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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9-09 05:06
중생한 자도 죄를 짓는가?(3)
 글쓴이 : 하늘소…
조회 : 424  

                                                                                                           본교 신약학 교수 김명도박사
완전주의자들이 말하는 바
, 성경에서 완전한 생활을 했다고 생각하는 인물들, , 노아(6:9), (1:1), 아사(왕상 15:14)들도 그들의 평생에 죄를 도무지 짓지 않은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죄 없다고 보아 주셔서 죄가 없는 것이다. 성도 누구에게나 모두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죄가 있지만, 예수의 보혈로 씻음을 받아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죄가 없다고 인정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의인(義人)이요 또한, 성도인 것이지, 우리의 옛 사람이, 즉 우리의 죄가 하루 아침에 아주 없어진 것이 결코 아니다.

세상에 죄가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나님 앞에서 말이다. 요한복음 8장에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불륜의 여인을 붙들고 주님에게 끌고 와서,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돌로 여인을 칠 것을 종용한 일이 기록되어 있는데, 누구보다 모세의 율법을 잘 알고 경건한 바리새인들 중에서 누가 돌을 던졌는가? 아무도 없었다. ?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이므로. 죄란 외형적인 것만을 말함보다도 마음으로 짓는 내면적인 죄를 말한다. 직접 형제를 살인한 적이 없어도 마음으로 그를 미워하면 이미 살인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요일 3:15). 성경에 나오는 가장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도 죄를 지었고, 때에 따라서는 무서운 죄를 짓기도 했다. 마음으로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것이 인간이다. 노아도, 아브라함도, 모세도, 욥도, 다윗도, 엘리야도 모두 그러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죄를 상습적으로 범한 것은 결코 아니다. 죄를 미워하며,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아주 죄를 짓지 않는 경지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채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다.

사도 요한은 요일 3:6,8-9 5:18에서,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다"고 했는데, 6절에서,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 하지 아니하노니라는 원문에서 보면, “hamartian ou poiei, 하마르티안 우 포이에이이므로 poiew 동사의 현재형 동사 직설법 삼인칭 단수를 사용했으므로, “죄를 상습적으로, 고의적으로 짓지 않는다라는 의미임이 아주 분명하다. 또한, 요일 3:8에서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란 말씀도 원어에서 “ho diabolos hamartanei, (호 디아볼로스 하마르타네이)”로서 역시 같은 문법적 사상이며, 3:9에서,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라는 말도 역시 똑같은 직설법 능동태 현재(indicative mood, active voice, present tense, 3rd person singular)를 사용하고 있다.

이 성경구절들이 무엇을 입증하는가? 헬라어에서 부정 부사(negative adverb, 否定副詞) ou를 사용하고 직설법 현재 동사를 사용하면, “계속해서 상습적으로 반복해서 어떤 동작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본문에서 볼 때, 세 구절이 모두 이에 해당한다. 6절과 9절에는,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상습적으로 습관적으로 반복해서 죄를 짓지 않는다라고 해석해야 한다. 우리말 성경에는 명확치 않아도 원문에서는 아주 분명하다. 반면에 3:8에서,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 함이라라는 말씀도 직설법 능동태이니, “마귀는 계속해서 상습적으로,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죄를 짓는다는 말이 분명해진다.

신약성경이 의미가 명확한 헬라어로 기록된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은혜인가?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난자, 중생한 자(중생한다는 말은, “위로부터 난 자, born from above”의 의미)는 결코 상습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전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과 다르다. 요일 1:8-10에 비추어 보면 죄 없다고 말할 사람이 아주 없다. 거듭난 사람이 죄를 마귀처럼 상습적으로(고의적으로) 지을 수 없다는 말이다. 물론 거듭난 사람도 아직 완성되지 못한 까닭에, (성화가 완성되지 못한) 아직도 죄를 짓게 마련이지만, 거듭나면 죄에 대해 민감해지고 죄를 안 지으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육신을 갖고 사는 한 죄에서 왼전히 해방될 수는 없는데, 이유는 믿는 즉시 우리 영혼은 부활했지만 우리 육신은아직 부활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우리 육신은 주님 재림 시에 부활한다. 주 재림 때에 우리가 죽지 않고 주님을 만나면, 죽음을 맛보지 않고 홀연히 순식간에 변하여 영화로운 몸이 된다 (고후 15장 참조).

그뿐만 아니라, 완전주의자들이 요한 일서의 말씀을 해석하면서 거듭난 성도가 죄를 지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하는 점은 그들 자신이 이 성경구절을 해석함에 있어서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지는 것이니, 그들은 말하기를, 믿는 성도 모두가 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죄 없는 상태까지 이 세상에서 도달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데, 만일 그들의 주장대로 한다면, 요한일서에 나오는 3:6, 8, 9 5:18 등은 모든 믿는 자들이 죄를 짓지 않으니 죄가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은혜에서 떨어지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니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한다면, 은혜에서 떨어질 수 없지 않은가? 죄를 짓지 않는 상태로 어떻게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자라 할지라도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바로 완전주의자들이니, 그들의 말이 모순되어 자승자박(自繩自縛)하는 결과가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요한일서의 여러 가지 성경구절들은 완전주의자들의 주장인, “중생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교리를 뒷받침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요한일서 3:9를 자주 인용해서 완전주의를 부르짖어도 그들의 주장은 스스로 모순될 뿐만 아니라, 요한일서에서 그들의 교리의 정당성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결론에 필연적으로 도달하게 된다.

이와 같은 완전주의자들의 교리에 대하여 몇 가지로 반박하여 바른 성경적 성화 (聖經的聖化, biblical sanctification) 교리를 찾아보려고 한다.

1. 성경 전체에 흐르는 사상을 참고하는 것은 성경 해석가들의 필수적 접근방법(必須的接近方法, indispensable method of approach)이다. 성경 전체에 흐르는 사상은 중생한 사람이 죄를 도무지 짓지 않는다는 교리를 가르치지 않는다. 앞서 언급했듯, 예를 들어, 왕상 8:46 에 보면,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저희가 주께 죄를 범하므로 주께서 저희에게 진노하사.....”라고 했고, 잠언 20:9에는,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뇨?”라고 했으며, 전도서 7:20에는,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라고 했고, 3:10-11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라고 했다. 성경의 무오설을 믿는다면, 이런 성경구절들을 무시하면서 죄인이 완전한 성화의 단계까지 도달할 수 있다고 가르칠 수 없다.

2.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자녀는 가장 거룩한 자녀라 해도,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한, 영과 육의 싸움(conflict between soul and body)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런 싸움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이 싸움의 가장 전형적인 예는 로마서 7:25ff. 에서 찾아본다.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회심하여 주의 사도가 되어 성경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7:22ff. 에서, “내 속 사람으로는 [즉 부활한 영혼]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 [부활하지 못한 육신]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도다라고 했고, 25절 하반 절에서는,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라고 그의 싸움을 기록하고 있다. 비단 바울만이 아니다. 성도들 모두에게 있는 공통되는 싸움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5:16-24에서 영과 육의 싸움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갈라디아 5:19 이하에,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라고 하면서, 여러 가지 자연인의 모습을 열거한다. 5:22 이하에서 성령의 열매란, “사랑과...........”라고 하면서 거듭난 사람의 생활 태도를 말한다. 옛 사람과 새 사람의 이같은 대결은 죽을 때까지 지속한다. 빌립보 3:10-14에 보면, 바울은 노년기에 기록한 말씀 중, “아직까지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않노라라고 하면서 아직도 완전해지지 못하고 지금도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가?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를 줄 아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조차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위에서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조차가노라라고 했다. 이 세상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원숙기인 이 시점에서도 자신은 아직도 완성되지 못하고 있다고 고백함을 알 수 있다. 오늘의 완전주의자들은 사도 바울보다 더욱 신앙이 돈독한가? 아니, 아무리 돈독해도 육신을 쓰고 있는 한 이 세상에서 살아갈 동안의 인간의 완전 성화는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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