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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08-02 04:40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5-24장)
 글쓴이 : 작은자
조회 : 1,966  
제15장 생명(生命)에 이르는 회개(悔改)

1. 복음적(福音的) 은혜(恩惠)
 생명(生命)에 이르는 회개(悔改)는 복음(福音. 말씀)에서 오는 은혜(恩惠)이다(슥 12:10; 행 11:18). 이 회개(悔改)의 교리(敎理)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信仰)의 교리(敎理)의 경우(境遇)와 마찬가지로, 모든 복음(福音)의 사역자(使役者)들에 의해 전파(傳播)되어야 한다(눅 24:47; 막 1:15; 행 20:21).

2. 회개(悔改)의 요소(要素)들
 회개(悔改)로 말미암아 죄인(罪人)은 자신(自身)의 죄(罪)가 위험(危險)할 뿐만 아니라, 더럽고 추악(醜惡)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性品)과 그의 의(義)로운 율법(律法)에 반대(反對)되는 것임을 눈으로 보고 깨달음으로 해서, 또한 회개(悔改)하는 자(者)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긍휼(矜恤)을 베푸신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자신(自身)의 죄(罪)를 슬퍼하고 미워하게 되며 그리하여 모든 죄(罪)에서 방향(方向)을 돌려 하나님께로 향(向)하게 된다(겔 18:30,31; 36:31; 사 30:22; 시 51:4 렘 31:18,19; 욜 2:12,13; 암 5:15; 시 11:128; 고후 7:11). 그리고 그의 모든 계명(誡命)들을 쫓아서 하나님과 동행(同行)하기로 작정(作定)하고 또한 노력(勞力)하게 되는 것이다(시 119:6,59,106; 눅 1:6; 왕하 23:25).

3. 절대적(絶對的) 필요성(必要性)
 회개(悔改)가 죄(罪)에 대한 어떤 속량(贖良)이 되거나, 죄(罪) 용서(容恕)의 어떤 원인(原因)이 되는 것으로 믿어서는 안 된다(겔 36:31,32; 16:61-63). 죄(罪) 사(赦)함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은혜(恩惠)의 행위(行爲)이다(호 14:2,4; 롬 3:24; 엡 1:7). 그렇지만 회개(悔改)는 모든 죄인(罪人)들에게 필요(必要) 불가결(不可缺)한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회개(悔改)함이 없이는 죄(罪) 사(赦)함을 기대(期待)할 수가 없다(눅 13:3,5; 행 17:30,31).

4. 회개(悔改)의 효력(效力)
 아무 죄(罪)라도 그것이 너무 적은 것이기 때문에 정죄(定罪)를 받지 않아도 되는 죄(罪)가 없는 것처럼(롬 6:23; 5:12; 마 12:36), 아무 죄(罪)라도 그것이 너무 크기 때문에, 참으로 회개(悔改)하는 자(者)들에게 정죄(定罪)를 가져오는 죄(罪)란 없는 것이다(사 55:7; 롬 8:1; 사 1:
16,18).

5. 구체적(具體的)인 회개(悔改)
 사람들은 일반(一般) 회개(悔改)로 만족(滿足)해서는 안 되고, 각자(各自) 자기(自己)의 죄(罪)들을 낱낱이 개별적(個別的)으로 힘써 회개(悔改)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의무(義務)다(시 19:13; 눅 19:8; 딤전 1:13,15).

6. 개인적(個人別) 고백(告白)과 공적(公的) 고백(告白)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자기(自己)의 죄(罪)를 개인적(個人的)으로 고백(告白)해야 하며, 그 죄(罪)에 대한 용서(容恕)를 간구(懇求)해야 한다(시 51:4,5,7,9,14; 32:5,6). 그렇게 간구(懇求)할 때, 그리고 죄(罪)들을 버릴 때 하나님의 긍휼(矜恤)을 덧입게 된다(잠 28:13; 요일 1:9). 그러므로 자기(自己)의 형제(兄弟)나 또는 그리스도의 교회(敎會)를 험담(險談)한 사람은, 사적(私的)으로 혹은 공적(公的)으로, 자기(自己)의 죄(罪)를 기꺼이 고백(告白)하며 통회(痛悔)하고, 손상(損傷)을 입은 사람들에게 자기(自己)의 회개(悔改)한 것을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이다(약 5:16; 눅 17:3,4; 수 7:19; 시 51). 그렇게 되면 그들은 그 사람(회개한)과 화목(和睦)해야 하며, 사랑으로 그를 영접(迎接)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고후 2:8).


    제16장 선행(善行)

1. 선행(先行)들과 하나님의 말씀
 '선행'(先行)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하신 말씀으로 명령(命令)하신 것들만을 가리킨다(미  6:8; 롬 12:2; 히 13:21). 즉 성경(聖經)의 보증(保證)이 없이, 맹목적(盲目的)인 열심(熱心)에 의(依)한 것이나, 선의(善意)를 가장(假裝)하여 사람들에 의해 고안(考案)된 것들은 선행(先行)이 아니다(마 15:9; 사 29:13; 벧전 1:8; 롬 10:2; 요 16:2; 삼상 15:21-23).

2.  선행(善行)들과 믿음(信仰)
 하나님의 계명(誡命)에 순종(順從)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선행(先行)은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信仰)의 열매들이요 증거(證據)이다(약 2:18,22). 그리고 신자(信者)들은 이 선행(先行)을 통(通)하여 그들의 감사(感謝)함을 표(表)하며(시 116:12,13; 벧전 2:9), 그들의 확신(確信)을 견고(堅固)케 하며(요일 2:3,5; 벧후 1:5-10), 형제(兄弟)들에게 덕(德)을 세우며(고후 9:2; 마 5:16), 복음(福音)에 대한 신앙(信仰) 고백(告白)을 돋보이게 하며(딛 2:5,9-12; 딤전 6:1), 대적자(對敵者)들의 입을 막고(벧전 2:15), 하나님께 영광(榮光)을 돌린다(벧전 2:12; 빌 1:11; 요 15:8). 저희들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바요, 그리스도 예수(耶蘇) 안에서 선(善)한 일을 위(爲)하여 창조(創造)된 것으로(엡 2:10)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음으로써, 결국(結局)은 영생(永生)을 얻을 수 있게 된다(롬 6:22).

3. 선행(先行)들과 성령(聖靈)
 선(善)을 행(行)할 수 있는 신자(信者)들의 능력(能力)은 결코 그들 자신(自身)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전적(全的)으로 그리스도의 영(靈)으로부터 나온다(요 15:4-6; 겔 36:26,27). 그리고 그들이 선(善)을 행(行)할 수 있으려면, 그들이 이미 받은 은혜(恩惠) 이외(以外)에도 그들 안에서 역사(役事)하여 자기(自己)의 기쁘신 뜻을 위(爲)해 그들로 하여금 소원(所願)을 두고 행(行)하게 하시는 바로 그 성령(聖靈)의 실제적(實際的)인 감화(感化)가 필요(必要)하다(빌 2:13; 4:13; 고후 3:5). 그렇다고 해서 성령(聖靈)의 특별(特別)한 역사(役事)가 없으면 아무런 의무(義務)도 실천(實踐)할 필요(必要)가 없는 것으로 오해(誤解)하여 나태(懶怠)에 빠져서는 안 되며,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恩惠)를 힘써 불일듯하게 해야 한다(빌 2:12; 히 6:11,12; 벧후 1:3,5,10,11; 사 64:7; 딤후 1:6 행 26:6,7; 유 20,21).

4.  선행(先行)들과 공로(功勞)
 순종(順從)을 통(通)해서 이생(一生)에서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정도(程度)의 선행(先行)에 도달(到達)한 사람들일지라도, 의무(義務) 이상(以上)의 공(功: supererogation)을 세운다든가, 하나님이 요구(要求)하시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결코 행(行)할 수가 없는데, 이는 그들이 마땅히 행(行)해야 할 의무(義務)마저도 그들은 다 행(行)할 수 없기 때문이다(눅 17:10; 느 13:22; 욥 9:2,3; 갈 5:17).

5. 선행(先行)들과 구원(救援)
 우리는 우리의 최선(最善)의 행동(行動)을 통(通)해서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죄(罪) 사(赦)함이나 영생(永生)을 얻을 만한 공로(功勞)를 세울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이유(理由)는 우리의 선행(先行)들과 장차 있을 영광(榮光) 사이에는 너무나도 큰 차이(差異)가 있으며,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도 무한(無限)한 거리(距離)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선행(先行)으로 하나님께 무엇을 보태어 드릴 수가 없고, 우리들의 전(前)에 범(犯)한 죄(罪)의 빚을 갚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롬 3:20; 4:2,4,6; 엡 2:8,9; 딛 3:5-7; 롬 8:18; 시 16:2; 욥 22:2,3; 35:7,8). 가령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다만 우리의 의무(義務)를 행(行)한 것 뿐이요, 우리는 무익(無益)한 종(從)들에 지나지 않는다(눅 17:10). 그런데 우리의 행위(行爲)들이 선(善)한 것은 그것들이 하나님의 성령(聖靈)으로 말미암는 데 있는 것이다(갈 5:22,23). 그러나 그 선행(先行)이 우리들에 의(依)해 행(行)하여질 때에는 여러 가지 연약성(軟弱性)과 불완전(不完全性)성으로 더럽혀지고 혼잡(混雜)되어 있어서 결국(結局) 하나님의 엄중(嚴重)한 심판(審判)을 견디어 낼 수가 없다(사 64:6; 갈 5:17; 롬 7:15,18 시 143:2; 130:3).

6. 선행(先行)들과 상급(賞給)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不具)하고, 신자(信者)들의 인간(人間)됨이 그리스도를 통(通)하여 용납(容納)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선행(先行)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용납(容納)되는 것이다(엡 1:6; 벧전 2:5; 출 28:38; 창 4:4 히 11:4). 그러나 그들이 이 세상(世上)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전혀 흠(欽)이 없거나 책망(責望) 받을 것이 없다는 뜻에서가 아니라(욥 9:20; 시 143:2),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들을 보시기 때문에, 비록 많은 연약성(軟弱性)과 불완전성(不完全性)을 수반(隨伴)하고 있을지라도, 성실(誠實)하게 행(行)한 것에 대(對)해서는 용납(容納)하시고 상(賞)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뜻이다(히 13:20; 고후 8:12; 히 6:10; 마 25:21,23).

7. 중생(重生)치 못한 자(者)들의 행위(行爲)들
 중생(重生)하지 못한 사람들에 의(依)해서 행(行)해지는 행위(行爲)들은 가령 그 자체(自體)로서는, 하나님께서 명(命)하신 것들이요, 그들 자신(自身)에게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선(善)하고 유익(有益)한 것들일지라도(왕하 10:30,31; 왕상 21:27,29; 빌 1:15,16,18), 그것들이 믿음(信仰)에 의하여 청결(淸潔)케 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창 4:5; 히 11:4,6), 말씀을 쫓아서 올바르게 행(行)해진 것도 아니며(고전 13:3; 사 1:12), 하나님의 영광(榮光)을 목적(目的)으로 삼지도 않았기 때문에(마 6:2,5,16), 그것들은 죄악(罪惡)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거나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에게서 은혜(恩惠)를 받기에 합당(合當)하게 할 수도 없다(학 2:14; 딛 1:15; 암 5:21,22; 호 1:4; 롬 9:16; 딛 3:5). 그렇지만 그 같은 행위(行爲)들을 그들이 게을리 하게 되면 그것은 더욱 죄악(罪惡)되며, 하나님을 더욱 불쾌(不快)하게 하는 것이 된다(시 14:4; 36:3; 욥 21:14,15; 마 25:41-43,45; 23:23).


    제17장 성도(聖徒)의 견인(堅忍)

1. 일반적(一般的) 서술(敍述)
 하나님께서 자기(自己)의 사랑하는 독생자(獨生子) 안에서 용납(容納)해 주시고, 그의 성령(聖靈)으로써 효과적(效果的)으로 부르시고 또한 거룩하게 하신 자(者)들은 은혜(恩惠)의 상태(狀態)에서 전적(全的)으로 또는 최종적(最終的)으로 타락(墮落)될 리 없으며, 그들은 마지막 날까지 그 상태(狀態)에 꾸준히 인내(忍耐)하여 머물러 있게 되며, 또한 영원(永遠)히 구원(救援)받을 것이다(빌 1:6; 벧후 1:10; 요 10:28,29; 요일 3:9; 벧전 1:5,9).

2. 견인(堅忍)의 근거(根據)
성도(聖徒)들의 이 견인(堅忍)은 그들 자신(自身)의 자유(自由) 의지(意志)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聖父)의 자유(自由)롭고 변(變)치 않는 사랑에서 나오는 예정(豫定)의 불변성(不變性)(딤 2:18,19; 렘 31:3)과 예수(耶蘇) 그리스도의 공로(功勞)와 중보(仲保)의 효력(效力)과(히 10:10,14; 13:20,21; 9:12-15; 롬 8:33-39; 요 17:11,24; 눅 22:32; 히 7:25), 성령(聖靈)의 내주(內住)하심과,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씨로 말미암은 것이요(요 14:16,17; 요일 2:27; 3:9) 은혜(恩惠) 언약(言約)의 본질(本質)에 달려 있는 것이다(렘 32:40). 이와 같은 모든 것에서 또한 견인(堅忍)의 확실성(確實性)과 무오성(無誤性)이 나오는 것이다(요 10:28; 살후 3:3; 요일 2:19).

3. 일시적(一時的)인 범죄(犯罪)들
 그러나 성도(聖徒)들은 사탄(satan)과 이 세상(世上)의 시험(試驗)을 받으며, 그들 안에 남아 있는 죄(罪)의 부패(腐敗)한 요소(要素)가 깊이 퍼지고, 그들을 보존(保存)해 주는 은혜(恩惠)의 방편(方便)들을 무시(無視)함으로 해서 중(重)한 죄(罪)에 빠질 수 있으며(마 26:70, 72, 74), 그리고 얼마 동안 그 죄(罪) 가운데 거(居)하기도 한다(시 51:14). 그로 말미암아 그들은 하나님의 분노(忿怒)를 사며(사 64:5,7,9; 삼하 11:27), 그의 성령(聖靈)을 근심케 하고(엡 4:30), 그들이 받은 바 은혜(恩惠)와 위로(慰勞)의 얼마를 상실(喪失)하게 되고(시 51:8,10,12; 계 2:4; 아 5:2-4,6), 그들의 마음이 강퍅해지고(사 63:17; 막 6:52; 16:14), 그들의 양심(良心)은 상처(傷處)를 받으며(시 32:3,4; 51:8), 남을 해(害)치거나 중상(中傷)하여(삼하 12:14) 일시적(一時的)인 심판(審判)을 자초(自招)하게 되는 것이다(시 89:31,32; 고전 11:32).


    제18장 은혜(恩惠)와 구원(救援)의 확신(確信)

1. 거짓된 확신(確信)과 참된 확신(確信)
 위선자(僞善者)나 그 밖에 중생(重生)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自身)들이 하나님의 은총(恩寵)과 구원(救援)의 상태(狀態)에 있는 줄로 알고서 거짓된 소망(所望)과 육적(肉的)인 억측(臆測)으로 헛되게 자기 자신(自身)을 속일 수 있으나(욥 8:13,14; 미 3:11; 신 29:19; 요 8:41), 그들이 가지고 있는 소망(所望)은 사라질 것이다(마 7:22,23). 그러나 주(主) 예수(耶蘇)를 참으로 믿고, 신실(信實)한 마음으로 그를 사랑하며, 그 앞에서 모든 선(善)한 양심(良心)을 따라서 힘써 행(行)하는 그러한 사람들은 이 세상(世上)에서 그들이 은혜(恩惠)의 상태(狀態)에 있다는 것을 확신(確信)할 수 있으며(요일 2:3; 3:14,18,19,21,24; 5:13), 하나님의 영광(榮光)의 소망(所望) 중(中)에서 즐거워할 수가 있다. 이 소망(所望)은 결코 그들을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이다(롬 5:2,5).

2. 근거(根據)
 이 확실성(確實性)은 허황(虛荒)된 소망(所望)에 근거(根據)한, 단순(單純)한 억측(臆測)에 지나지 않는 그럴듯한 확신(確信)이 아니라(히 6:11,19)(히 6:17,18). 이 확신(確信)은 구원(救援)을 약속(約束)한 하나님의 진리(眞理)에 근거(根據)한 틀림없는 믿음(信仰)의 확신(確信)이다. 그리고 이것은 약속(約束)들을 하게 된 그 은혜(恩惠)들에 대한 내적(內的) 확증(確證)(벧후 1:4,5,1 0,11; 요일 2:3; 3:14; 고후 1:20)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子女)인 것을 우리의 영(靈)으로 더불어 증거(證據)하는 성령(聖靈)의 증거(證據) 등(等)에 기초(基礎)하고 있다(롬 8:15,16). 이 영(靈)은 우리의 기업(企業)에 대한 보증(保證)이며, 이 영(靈)으로 말미암아 구속(救贖)의 날까지 우리가 인(印)치심을 받았다(엡 1:13,14; 4:30; 고후 1:21,22).

3. 얻는 방법(方法)과 유익(有益)들
 절대(絶對)로 틀림없는 이 확신(確信)은 믿음(信仰)의 본질(本質)에 속(屬)한 것이 아니라, 참 신자(信者)가 오랫동안 기다리고 많은 난관(難關)들에 부딪히고 난 연후(後)에야 그 확신(確信)을 갖게 되는 것이다(요일 5:13; 사 50:10; 막 9:24; 시 88; 77:1-12). 그렇지만 하나님께로부터 그에게 값없이 주어진 것들을 그가 성령(聖靈)을 통(通)하여 알 수 있기 때문에, 색(色)다른 특별(特別)한 계시(啓示) 없이도, 통상적(通常的)인 방편(方便)들을 올바르게 사용(使用)함으로써 그 확신(確信)에 도달(到達)할 수가 있다(고전 2:12; 요일 4:13; 히 6:11,12; 엡 3:17-19). 그러므로 모든 신자(信者)에게는 자기(自己)의 부르심과 택(擇)하심을 확실(確實)하게 하기 위(爲)하여 열심(熱心)을 다할 의무(義務)가 있는 것이다(벧후 1:10). 그렇게 함으로 해서 그의 마음은 성령(聖靈) 안에서 화평(和平)과 희락(喜樂)으로 넘치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감사(感謝)로 넘치며, 또한 복종(服從)하는 일에 있어서는 힘 있고 유쾌(愉快)하게 된다(롬 5:1,2,5; 14:17; 15:13; 엡 1:3,4; 시 4:6,7; 119:32). 이 같은 것들은 확신(確信)에서 오는 당연(當然)한 열매들이다. 그러므로 이 확신(確信)을 갖게 되면 사람들은 결코 방탕(放蕩)한 생활(生活)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요일 2:1,2; 롬 6:1,2; 딛 2:11,12,14; 고후 7:1; 롬 8:1,12; 요일 3:2,3; 시 130:4; 요일 1:6,7).

4. 그것의 상실(喪失)과 회복(回復)
 참 신자(信者)일지라도 그들의 구원(救援)의 확신(確信)이 여러 가지 모양(模樣)으로 흔들리며, 약(弱)해지며 일시(一時) 중단(中斷)될 수 있는데, 이 같은 일들은 그 확신(確信)을 보존(保存)하는 것을 게을리 하거나, 양심(良心)에 상처(傷處)를 주고 성령(聖靈)을 근심케 하는 어떤 특별(特別)한 죄(罪)에 빠지거나 어떤 갑작스럽거나 강렬(强烈)한 시험(試驗)에 의(依)해서, 또는 하나님께서 그의 얼굴의 빛을 숨기시어 그를 경외(敬畏)하는 자(者)일지라도 흑암(黑暗) 중(中)에 행(行)하며 전혀 빛이 없게 되게 하심으로 말미암는 것이다(아 5:2,3,6; 시 51:8,12,14; 엡 4:30,31; 시 77:1-10; 마 26:69-72; 시 31:22; 시 88; 사 1:10). 그렇지만 하나님의 씨와 믿음의 생활(生活)이나, 그리스도와 형제(兄弟)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의무(義務)에 대한 신실(信實)한 마음과 양심(良心)이 결코 전적(全的)으로 그들에게 결여(缺如)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령(聖靈)의 역사(役事)로 말미암아 이 확신(確信)이 적당(的當)한 때에 소생(蘇生)하게 되는 것이며(요일 3:9; 눅 22:32; 욥 13:15; 시 73:15; 51:8,12; 사 1:10), 또한 그간의 심한 절망(絶望)에서도 이 성령(聖靈)의 역사(役事)로 말미암아 그들이 버티어 내는 것이다(미 7:7-9; 렘 32:40; 사 54:7-10; 시 22:1; 88)


    제19장 하나님의 율법(律法)

1. 아담에게 주신 법(法)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한 율법(律法)을 행위(行爲) 언약(言約)으로 주셨는데,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後孫)들로 하여금 개인적(個人的)으로 온전(穩全)하게, 정확(正確)하게, 그리고 영구적(永久的)으로 순종(順從)할 의무(義務)가 있게 하셨고, 동시(同時)에 그 율법(律法)을 성취(成就)하면 생명(生命)을 주시겠다고 약속(約束)하시고, 그것을 깨뜨리면 사망(死亡)을 주겠다고 경고(警告)하셨으며, 그것을 지킬 수 있는 힘과 능력(能力)을 그에게 부여(附與)해 주셨다(창 1:26,27; 2:17; 롬 2:14,15; 10:5; 5:12,19; 갈 3:10,12; 전 7:29; 욥 28:28).

2. 도덕법(道德法)
 이 율법(律法)은, 아담이 타락(墮落)한 후(後)에도, 의(義)에 대한 완전(完全)한 규칙(規則)으로 존속(存續)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의(義)의 규칙(規則)으로,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십계명(十誡命)의 형식(形式)으로 두(二) 돌판(石板)에 기록(記錄)하여 전(傳)하여 주셨는데(약 1:25; 2:8,10-12; 롬 13:8,9; 신 5:32; 10:4 출 3:1), 처음 네(四) 계명(誡命)은 하나님(神)께 대한 우리의 본분(本分)을 포함(包含)하고 있고, 나머지 여섯(六) 계명(誡命)은 사람(人)에 대한 우리의 본분(本分)을 포함(包含)하고 있다(마 22:37-40).

3. 의식법(儀式法)
 일반적(一般的)으로 도덕법(道德法)이라고 불리는 이 율법(律法) 외(外)에도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미숙(未熟)한 교회(敎會)인 이스라엘 백성(百姓)에게 의식법(儀式法)을 주셨다. 거기에는 몇 가지 모형적(模型的)인 의식(儀式)들이 포함(包含)되어 있는데, 부분적(部分的)으로는 예배(禮拜)에 대한 것으로서, 그것은 그리스도와, 그를 통(通)해서 베풀어질 은혜(恩惠)를, 그가 행(行)하실 일들, 그가 받을 고난(苦難)들, 그리고 그의 공로(功勞)로 주어질 유익(有益)들을 예표(豫表)하고 있으며(히 9; 10:1; 갈 4:1-3; 골 2:17), 또한 부분적(部分的)으로는 도덕적(道德的)인 의무(義務)들에 대한 여러 가지 교훈(敎訓)들이 제시(提示)되어 있다(고전 5:7; 고후 6:17; 유 23). 그런데 이 모든 의식법(儀式法)들은 지금 신약(新約) 시대(時代)에는 폐기(廢棄)되었다(골 2:14,16
,17; 단 9:27; 엡 2:15,16).

4. 재판법(裁判法)
 하나님께서는 정치적(政治的) 집단(集團)인 이스라엘 백성(百姓)들에게 여러 가지 재판(裁判)에 관(關)한 율법(律法)들을 주셨다. 그러나 그 재판법(裁判法)은 그 백성(百姓)의 나라와 함께 시효(時效)가 만료(滿了)되었으며, 따라서 그것의 일반적(一般的)인 원리(原理)는 적용(適用)될 수 있겠으나, 지금은 다른 아무에게도 구속력(拘束力)이 없다(출 21; 22:1-29; 창 49:10; 벧전 2:13,14; 마 5:17,38,39; 고전 9:8-10).

5. 도덕법(道德法)의 영속성(永續性)
 도덕법(道德法)은 불신자(不信者)들뿐만 아니라 의(義)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을 포함(包含)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永遠)토록 구속력(拘束力)이 있으므로 해서 그것에 복종(服從)케 한다(롬 13:8-10; 엡 4:2; 요일 2:3,4,7,8). 그리고 그 법(法)안에 포함(包含)되어 있는 내용(內容)에 관(關)해서 뿐만 아니라, 그것을 주신 창조주(創造主) 하나님의 권위(權威) 때문에 복종(服從)해야 하는 것이다(약 2:10,11).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복음(福音)으로 도덕법(道德法)의 이 같은 의무(義務)를 결코 폐(廢)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강화(强化)시키신다(마 5:17-19; 약 2:8; 롬 3:31).

6. 도덕법(道德法)의 유익(有益)들
 참 신자(信者)들은 행위(行爲) 언약(言約)으로서의 율법(律法) 아래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으로 말미암아 의(義)롭다 함을 받는다거나 정죄(定罪)함을 받지 않는다(롬 6:14; 갈 2:16; 3:13; 4:4,5; 행 13:39; 롬 8:1). 그렇지만 불신자(不信者)들에게 뿐만 아니라 참 신자(信者)들에게도 행위(行爲) 언약(言約)으로서의 율법(律法)이 아주 유용(有用)한 것은 그것이 생활(生活)의 법칙(法則)으로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과 그들이 지켜야 할 의무(義務)에 대해서 알려 줌으로써, 그들을 지도(指導)하고 강제(强制)하여 그것에 따라 행(行)하게 하기 때문이다(롬 7:12,22,25; 시 119:4-6; 고전 7:19; 갈 5:14,16,18-23).

또한 그들의 본성(本性)과 마음과 생활(生活)이 죄악(罪惡)으로 오염(汚染)되어 있는 것을 발견(發見)케 하고(롬 7:7; 3:20), 그렇게 해서 자신(自身)들을 살핌으로써, 죄(罪)에 대하여 깨닫게 하고, 죄(罪)를 인(因)하여 겸비(兼備)하게 하고, 죄(罪)를 증오(憎惡)하기에 이르게 하며(약 1:23-25; 롬 7:9,14,24), 또한 그리스도와 그의 완전(完全)한 순종(順從)이 자기(自己)들에게 필요(必要)하다는 것을 더욱 분명(分明)하게 알게 해 주기 때문인 것이다(갈 3:24; 롬 7:24,25; 8:3,4). 마찬가지로 중생(重生)한 자(者)에게도 그들의 부패(腐敗)를 억제(抑制)하는 데 행위언약(行爲言約)으로서의 율법(律法)이 유용(有用)함은, 그것이 죄(罪)를 금(禁)하기 때문이다(약 2:11
; 시 119:101,104,128).

그리고 그 율법(律法)의 경고(警告)들은, 비록 중생(重生)한 자(者)들이 율법(律法)에 경고(警告)되어 있는 저주(詛呪)로부터는 해방(解放)되어 있지만(스 9:13,14; 시 89:30-34), 그들이 지은 죄(罪)들로 인하여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이 무엇이며, 또한 이생(一生)에서 어떠한 고통(苦痛)들을 기대(期待)해야 하는가를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역시 마찬가지로, 율법(律法)의 약속(約束)들은 하나님께서 율법(律法)에 순종(順從)하는 것을 얼마나 기뻐하시고, 또 율법(律法)을 성취(成就)하는 때 그들에게 어떠한 축복(祝福)을 주시는가를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레 26:1-14; 고후 6:16; 엡 6:2,3; 시 37:11; 마 5:6; 시 19:11).

그러므로 율법(律法)이 선(善)을 장려(獎勵)하고 악(惡)을 막는다고 해서 사람이 선(善)을 행(行)하고 악(惡)을 삼가는 것은 그것이 곧 그가 율법(律法) 아래 있고, 은혜(恩惠) 아래 있지 않다는 증거(證據)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롬 6:12; 벧전 3:8-12; 시 34:12-16; 히 12:28,29).

7. 도덕법(道德法)과 복음(福音)의 은혜(恩惠)
 앞서 언급(言及)한 율법(律法)의 용도(用途)는 복음(福音)의 은혜(恩惠)와 상충(相衝)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 조화(調和)된다(갈 3:21). 그리스도의 영(靈)은 인간(人間)의 의지(意志)를 억제(抑制)하고 율법(律法) 안에 계시(啓示)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필요(必要)한 일을 자유(自由)롭고 기쁜 마음으로 행(行)할 수 있게 해 준다(겔 36:27; 히 8:10; 렘 31:33).



    제20장 그리스도인(基督人)의 자유(自由)와 양심(良心)의 자유(自由)

1. 그리스도인(基督人)의 자유(自由)
 죄책(罪責)과 하나님의 정죄(定罪)하시는 진노(震怒), 그리고 도덕법(道德法)의 저주(詛呪)로부터 해방(解放)되는 것과(딛 2:14; 살전 1:10; 갈 3:13) 현재(現在)의 이 악(惡)한 세상(世上), 사탄의 굴레와 죄(罪)의 지배(支配)로부터 신자(信者)들이 벗어나는 것과(갈 1:4; 골 1:3; 행 26:18; 롬 6:14) 환란(患難)과 죽음(死亡)과 무덤이 주는 고통(苦痛)과 좌절감(挫折感) 및 영원(永遠)한 형벌(刑罰)로부터 자유(自由)케 되는 것과(롬 8:28; 시 119:71; 고전 15:54-57; 롬 8:1) 또한 하나님께 신자(信者)들이 자유롭게 나아가는 것과(롬 5:1,2) 노예적(奴隸的)인 공포심(恐怖心)에서가 아니라 어린애 같은 사랑과 자원(自願)하는 마음에서 하나님께 순종(順從)하는 것 등이다(롬 8:14,15; 요일 4:18). 이상(以上)의 모든 것은 율법(律法) 시대(時代)의 신자(信者)들에게도 있었던 일이다(갈 3:9,14). 그러나 신약(新約) 시대(時代)에는 그리스도인(基督人)들의 자유(自由)가 더욱 확대(擴大)되어, 유대(judea) 교회(敎會)가 복종(服從)하였던 의식법(儀式法)의 멍에로부터 해방(解放)되었고(갈 4:1-3,6,7; 5:1; 행 15:10,11), 더욱 담대(膽大)하게 은혜(恩惠)의 보좌(寶座)에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으며(히 4:14,16; 10:19-22), 하나님의 영(靈)과의 교통(交通)을 율법(律法) 시대(時代)의 신자(信者)들이 통상적(通常的)으로 누렸던 것보다 훨씬 더 충만(充滿)하게 누리게 되었다(요 7:38; 고후 3:13,17,18).

2. 양심(良心)의 자유(自由)
 하나님만이 양심(良心)을 주관(主管)하시는 주(主)님이시며(약 4:12; 롬 14:4), 그는 신앙(信仰)이나 예배(禮拜)에 관(關)한 일에 있어서(행 4:19; 5:29; 고전 7:23; 마 23:8-10; 고후 1:24; 마 15:9) 자기(自己)의 말씀에 조금이라도 배치(背馳)되거나 혹은 벗어나는 인간(人間)들의 교훈(敎訓)들과 계명(誡命)들로부터 양심(良心)을 해방(解放)시켜 주셨다. 그러므로 그러한 교훈(敎訓)들을 믿는다거나, 또는 양심(良心)을 범(犯)하여 그러한 계명(誡命)들에 순종(順從)하는 것은 양심(良心)의 참 자유(自由)를 배반(背反)하는 것이다(골 2:20,22,23; 갈 1:10; 2:4,5; 5:1). 또한 맹신(盲信)과 맹종(盲從)을 요구(要求)하는 것은 양심(良心)과 이성(理性)의 자유(自由)를 파괴(破壞)하는 것이다(롬 10:17; 14:23; 사 8:20; 행 17:11; 요 4:22; 호 5:11; 계 13:12,16,17; 렘 8:9).

3. 그리스도인(基督人)의 자유(自由)의 목적(目的)
 그리스도인의 자유(自由)를 구실(口實)로 하여 죄(罪)를 범(犯)하거나, 정욕(情慾)을 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基督人)의 자유(自由)의 목적(目的)을 파괴(破壞)하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인의 자유(自由)의 목적(目的)은 우리가 원수(怨讐)들의 손아귀에서 건짐을 받아, 평생(平生)토록 주(主)님을 두려움 없이 주(主)님 앞에서 거룩함과 의(義)로움으로 섬기려는 데 있다(갈 5:13; 벧전 2:16; 벧후 2:19; 요 8:34; 눅 1:74,75).

4. 그리스도인(基督人)의 자유(自由)의 제한성(制限性)
 하나님께서 정(定)하여 세우신 권세(權勢)들과, 그리스도께서 값 주고 사신 자유(自由)는 양자(兩者)가 서로 충돌(衝突)하여 파괴(破壞)하도록 하나님에 의(依)해 의도(意圖)된 것이 아니라, 상호간(相互間)에 서로를 시인(是認)하여 보존(保存)되도록 의도(意圖)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자유(自由)를 구실(口實)로 하여, 합법적(合法的)인 권세(權勢) - 그것이 국가적(國家的)인 것이든 아니면 교회적(敎會的)인 것이든 간에 - 나 그 권세(權勢)의 행사(行事)를 반대(反對)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령(法令)을 반항(反抗)하는 것이 된다(마 12:25; 벧전 2:13,14,16
;롬 13:1-8; 히 13:17). 그리고 신앙(信仰)과 예배(禮拜) 또는 시민(市民) 생활(生活)에 관(關)해 본성(本性)의 빛이나, 기독교(基督敎)의 일반(一般) 원리(原理)나, 또는 경건(敬虔)한 권세(權勢)에 반대(反對)되는 그러한 견해(見解)들을 발표(發表)하거나, 그러한 행동(行動)들을 지속적(持續的)으로 행사(行事)하는 경우, 또는 그러한 그릇된 견해(見解)나 소행(所行)들이 본격적(本格的)으로나 그것들을 발표(發表)하거나 행사(行事)하는 방법(方法) 면에서, 그리스도가 교회(敎會) 안에 세우신 외적(外的) 평화(平和)와 질서(秩序)를 파괴(破壞)하는 경우, 그러한 사람들이 책망(責望)을 받고, 교회(敎會)의 견책(譴責)을 받아 고소(告訴)당하는 것은 마땅하다(롬 1:32; 고전 5:1,5,11,13; 요이 10,11; 살후 3:14; 딤전 6:3-5; 딛 1:10,11,13; 3:10; 마 18:15-17; 딤전 1:19,20; 계 2:2,14,15,20; 3:9).


    제21장 예배(禮拜)와 안식일(安息日)

1. 예배(禮拜)의 바른 방법(方法)
 본성(本性)의 빛(light of nature)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 하나님은 만물(萬物)에 대(對)하여 통치권(統治權)과 주권(主權)을 행사(行事)하신다. 그는 선(善)하시며, 만물(萬物)에게 선(善)을 행(行)하신다. 그러므로 인간(人間)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性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를 경외(敬畏)하며, 사랑하며, 찬양(讚揚)하며, 부르며, 신뢰(信賴)하며, 그리고 섬겨야 하는 것이다(롬 1:20; 행 17:24; 시 119:68; 렘 10:7; 시 31:23; 18:3; 롬 10:12; 시 162:8; 수 24:14; 막 12:33). 그러나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禮拜)하는 합당(合當)한 방법(方法)은 그 자신(自身)이 친(親)히 정(定)해 주셨으므로 그 자신(自身)의 계시(啓示)된 뜻 안에서 한정(限定)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상상(想像)이나 고안(考案), 또는 사탄의 지시(指示)에 따라 어떤 가견적(可見的)인 구상(具象)을 사용(使用)하거나, 성경(聖經)에 규정(規定)되어 있지 않는 다른 방법(方法)을 따라서는 하나님을 예배(禮拜)할 수가 없다(신 12:32; 마 15:9; 행 17:25
; 마 4:9,10; 신 15:1-20; 출 20:4-6; 골 2:23).

2. 예배(禮拜)의 대상(對象)과 중보자(仲保者)
 종교적(宗敎的) 예배(禮拜)는 성부(聖父)와 성자(聖子)와 성령(聖靈) 하나님께 드려야 하며 또한 오직 그에게만 드려야 한다(마 4:10; 요 5:23; 고후 13:14). 천사(天使)나, 성자(聖者)들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被造物)들에게도 드려서는 안 된다(골 2:18; 계 19:10; 롬 1:25). 그리고 아담의 타락(墮落) 이후로는 중보자(仲保者) 없이 드릴 수가 없고, 또한 다만 그리스도(基督) 이외(以外)의 어떤 다른 중보(仲保)로도 드릴 수가 없다(요 14:6; 딤전 2:5; 엡 2:18; 골 3:17).

3.  기도(祈禱)의 방법(方法)
 감사(感謝)함으로 드리는 기도(祈禱)는, 종교적(宗敎的) 예배(禮拜)의 한 특별(特別)한 요소(要素)로서(빌 4:6),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要求)하신다(시 65:2). 기도(祈禱)가 열납(悅納)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성자(聖子)의 이름으로(요 14:13,14; 벧전 2:5), 성령(聖靈)의 도우심을 받아(롬 8:26),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요일 5:14) 사려(思慮) 분별(分別)과 경외심(敬畏心)과 겸손(謙遜)과 열심(熱心)과 믿음(信)과 사랑(愛)과 인내(忍耐)를 가지고 하되(시 47:7; 전 5:1,2; 히 12:28; 창 18:27; 약 5:16; 1:6,7; 막 11:24; 마 6:12,14,15; 골 4:2; 엡 6:18), 만일 소리를 내어 하는 경우(境遇)에는 알 수 있는 말로 해야 한다(方言禁止)(고전 14:14).

4. 기도(祈禱)의 제목(題目)들
 기도(祈禱)는 합당(合當)한 것들과(요일 5:14) 모든 종류(種類)의 생존(生存)하는 사람들이나, 장차 생존(生存)하게 될 자(者)들을 위(爲)해서 하되(딤전 2:1,2; 요 17:20; 삼하 7:29; 룻 4:12
), 죽은 자(死者)들이나(삼하 12:21-23; 눅 16:25,26; 계 14:13) 사망(死亡)에 이르는 죄(罪)를 지은 것으로 알려진 자(者)들을 위(爲)하여는 하지 말 것이다(요일 5:16).

5. 예배(禮拜)의 요소(要素)들
 경건(敬虔)한 마음으로 성경(聖經)을 읽는 것과(행 15:21; 계 1:3), 흠(欽) 없는 설교(說敎)와(딤후 4:2), 하나님께 순종(順從)하여 사려(思慮) 분별(分別)과 믿음(信仰))과 경외심(敬畏心)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정성(精誠)껏 듣는 것과(약 1:22; 행 10:33; 마 13:19; 히 4:2; 사 66:2), 마음에 은혜(恩惠)로 시편(詩篇)을 노래하는 것과(골 3:16; 엡 5:19; 약 5:13), 그리스도께서 정(定)하신 성례(聖禮)를 합당(合當)하게 집행(執行)하고 값있게 받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통상적(通常的)인 종교적(宗敎的) 예배(禮拜)의 모든 요소(要素)들이다(마 28:19; 고전 11:23-29; 행 2:42). 이것들 외(外)에도, 종교적(宗敎的) 맹세(盟誓)와(신 6:13; 느 10:29), 서원(誓願)과(사 19:21; 전 5:4,5), 엄숙(嚴肅)한 금식(禁食)과(욜 2:12; 에 4:16; 마 9:15; 고전 7:5), 특별(特別)한 경우(境遇)에 드리는 감사(感謝) 등(等)은(시 107; 에 9:22) 몇 차례 적당(的當)한 시기(時期)에 거룩하고 종교적(宗敎的)인 방식(方式)으로 실시(實施)할 것이다(히 12:28).

6. 예배(禮拜)의 장소(場所)
 지금 복음(福音) 시대(時代)에서, 기도(祈禱)나 기타(其他)의 다른 종교적(宗敎的)인 예배(禮拜) 행위(行爲)는 그것이 시행(施行)되는 장소(場所)가 고정(固定)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장소(場所)를 향(向)하여 드릴 필요가 없으며, 그 장소(場所) 여하(如何)에 따라서 기도(祈禱)나 예배(禮拜) 행위(行爲)가 더 잘 열납(悅納)되는 것도 아니다(요 4:21). 하나님께서는 어디에서나(말 1:11; 딤전 2:8), 신령(神靈)과 진리(眞理)로 예배(禮拜) 드려야 한다(요 4:23,24). 각(各) 가정(家庭)에서(렘 10:25; 신 6:6,7; 욥 1:5; 삼하 6:18,20; 벧전 3:7; 행 10:2), 매일(每日)(마 6:11), 그리고 은밀(隱密)한 중(中)에 개별적(個別的)으로 드릴 수도 있고(마 6:6; 엡 6:18), 더욱 엄숙(嚴肅)하게 공적(公的)인 모임들에서 드릴 수도 있으나, 하나님께서 자기(自己)의 말씀이나 섭리(攝理)에 의(依)하여 기도(祈禱)나 예배(禮拜)를 드리도록 요구(要求)하신 때에, 경솔(輕率)하게 행(行)하거나 고의적(故意的)으로 소홀(疏忽)히 하거나 저버려서는 안 된다(사 56:6,7; 히 10:25; 잠 1:20,21,24; 8:34; 행 13:42; 눅 4:16; 행 2:42).

7. 안식일(安息日)
 일반적(一般的)으로 하나님께 예배(禮拜)하기 위(爲)하여 일정(一定)한 시간(時間)을 정(定)하는 것은 자연(自然)의 법칙(法則)에 합당(合當)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통(通)하여 적극적(積極的)이고 도덕적(道德的)이며 영구적(永久的)인 명령(命令)으로써, 모든 시대(時代)의 모든 사람들에게, 특별(特別)히 이레(七日) 중 하루(一日)를 안식일(安息日)로 택정(擇定)하여 하나님께 거룩하게 지키도록 명(命)하셨다(출 20:8,10,11; 사 56:2,4,6,7). 그 날은 창세(創世)로부터 그리스도의 부활(復活)까지는 한 주간(週刊)의 마지막 날이었으나, 그리스도의 부활(復活) 이후(以後)로는, 한 주간(週刊)의 첫째 날로 바뀌어졌다(창 2:2,3; 고전 16:1,2; 행 20:7). 성경(聖經)에는 이 날이 주의 날(主日)로 불려져 있다(계 1:10). 이 날은 세상(世上) 끝 날까지 기독교(基督敎)의 안식일(安息日)로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출 20:8,10; 마 5:17,18).

8. 안식일(安息日)을 거룩히 지키는 방법(方法)
 그러므로 안식일(安息日)은 주(主)님께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이를 위(爲)해서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을 합당(合當)하게 준비(準備)하고, 그들의 일상적(日常的)인 일들을 미리 정돈(整頓)한 연후(後)에, 그날에 하루 종일 그들 자신(自身)의 일과, 그들의 세상적(世上的)인 일에 대한 말이나 생각, 그리고 오락(娛樂)을 중단(中斷)하고 거룩하게 안식(安息)할 뿐만 아니라(출 20:8;16
:23,25,26,29,30; 31:15-17; 사 58:13; 느 13:15-19,21,22), 모든 시간(時間)을 바쳐서 공적(公的)으로 개인적(個人的)으로 하나님께 예배(禮拜)하는 일과 부득이 해야 할 필요(必要)가 있는 일과 자비(慈悲)를 베푸는 일을 해야 한다(사 58:13; 마 12:1-13).


    제22장 합당(合當)한 맹세(盟誓)와 서원(誓願)

1. 맹세(盟誓)의 의미(意味)
 합당(合當)한 맹세(盟誓)는 경건(敬虔)한 예배(禮拜)의 한 요소(要素)이다(신 10:20). 예배시(禮拜時), 때를 따라, 맹세(盟誓)하는 사람이 엄숙(嚴肅)하게 하나님을 불러서 그가 주장(主張)하거나 약속(約束)하는 것을 증거(證據)하시게 하며, 그뿐 아니라 그는 진리(眞理)에 따라 판단(判斷)하고 또 그가 서원(誓願)한 것에 허위(虛僞)가 없는가 판단(判斷)하기 위(爲)하여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다(출 20:7; 레 19:12; 고후 1:23; 대하 6:22,23).

2. 맹세(盟誓)에 사용(使用)되는 하나님의 이름(神名)
 사람들은 하나님(神)의 이름(名)만으로 맹세(盟誓)해야 한다. 그리고 맹세(盟誓)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전적(全的)으로 두려워하는 마음과 경외심(敬畏心)을 가지고 사용(使用)해야 한다(신6:13). 그러므로 그 영광(榮光)스럽고 두려운 이름으로 망령(妄靈)되이 또는 경솔(輕率)하게 맹세(盟誓)하거나 기타(其他) 다른 것으로 맹세(盟誓)하게 되면, 그것은 죄악(罪惡)되고 가증(可憎)스런 것이다(출 20:7; 렘 5:7; 마 5:34,37; 약 5:12). 맹세(盟誓)는 그 중요성(重要性)과 시기(時期)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依)하여 보증(保證)된 것으로 신약(新約) 성경(聖經)에 다 마찬가지로 허락(許諾)된 것이다(히 6:16; 고후 1:23; 사 65:16). 따라서 합당(合當)한 맹세(盟誓)는 합법적(合法的)인 권세(權勢)로 말미암아 요구(要求)될 때에는 이를 행(行)해야 하는 것이다(왕상 8:31; 느 13:25; 스 10:5).

3. 맹세(盟誓)의 내용(內容)들
 맹세(盟誓)를 하는 자(者)는 누구나 그것이 매우 중요(重要)하고 엄숙(嚴肅)한 행위(行爲)임을 충분(充分)하게 생각해야 하며, 맹세(盟誓)할 때에 자기(自己)가 진리(眞理)라고 확신(確信)하는 것 외(外)에는 아무 것도 공언(公言)하여서는 안 된다(출 20:7; 렘 4:2). 또한 누구든지 선(善)하고 정당(正當)한 것 그리고 그렇게 믿어지는 것과, 자기(自己)가 행(行)할 능력(能力)이 있거나 하기로 결심(決心)하는 것 이외(以外)에는 아무 것에 대해서도 맹세(盟誓)하지 말아야 한다(창 24:2,3,5,6,8,9). 그와 동시(同時)에 합법적(合法的)인 권세(權勢)가 선(善)하고 정당(正當)한 것에 대한 맹세(盟誓)를 요구(要求)하는 때에 그것을 거절(拒絶)하는 것은 죄(罪)가 된다(민 5:1
9,21; 느 5:12; 출 22:7-11).

4. 맹세(盟誓)의 말과 구속력(拘束力)
 맹세(盟誓)는 애매모호(曖昧模糊)하지 않게, 분명(分明)하고 평범(平凡)한 말로 해야 한다. 맹세(盟誓)로 말미암아 죄(罪)를 짓게 되어서는 안 된다(렘 4:2; 시 24:4). 그러나 죄(罪)가 되지 않는 것을 맹세(盟誓)하게 된 때에는, 자신(自身)에게 손해(損害)가 될지라도 반드시 실행(實行)해야 하며(삼상 25:22,32-34; 시 15:4), 비록 이단자(異端者)나 불신자(不信者)들에게 한 경우(境遇)일지라도 어겨서는 안 된다(겔 17:16,18,19; 수 9:18,19; 삼하 21:1).

5. 서원(誓願)
 서원(誓願)은 서약(誓約)과 같은 성격(性格)을 띠고 있다. 그러므로 서원(誓願))을 행(行)할 때도 같은 경건(敬虔)한 배려(配慮)와 성실성(誠實性)을 가지고 해야 하는 것이다(사 19:21; 전 5:4-6; 시 61:8; 66:13,14).

6. 서원(誓願)의 대상(對象)과 방법(方法)
 서원(誓願)은 어떤 피조물(被造物)에 대(對)해서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해서만 할 것이다(시 76:11; 렘 44:25,26). 그 서원(誓願)이 열납(悅納)되려면 자원(自願)하는 마음으로, 믿음과 의무감(義務感)에서 해야 한다. 또한 받은 바 은혜(恩惠)에 감사(感謝)하여, 아니면 우리가 원(願)하던 바를 얻은 것을 인(因)하여 해야 한다. 그리고 필요(必要)한 의무(義務)나 그 밖의 것들이 그 서원(誓願)을 갚는 데 적절(適切)하게 이바지하는 한, 그 서원(誓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필요(必要)한 의무(義務)와 그 밖의 것들을 보다 엄격(嚴格)하게 지켜야 한다(신 23:21-1
3; 시 1:14; 창 28:20-22; 삼상 1:11; 시 66:13,14; 시 132:2-5).

7. 서원(誓願)해서는 안 되는 것들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금(禁)해져 있는 것에 대(對)하여 서원(誓願)해서는 안 된다. 또 하나님의 말씀에 명령(命令)되어 있는 의무(義務)를 방해(妨害)하는 것이나, 또는 그 자신(自身)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 그리고 그 서원(誓願)을 이행(履行)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께로부터 아무런 약속(約束)이나 능력(能力)을 얻지 못한 것에 대해서 서원(誓願)을 해서는 안 된다(행 23:12
,14; 막 6:26; 민 30:5,8,12,13). 이러한 점(點)에 비추어 볼 때, 교황청(敎皇廳)의 수도원(修道院)에서의 종신(終身) 독신(獨身) 생활(生活)과 궁핍(窮乏) 생활(生活)과 규칙적(規則的)인 순종(順從)의 생활(生活)에 대한 서원(誓願)들은 완전(完全)하게 지킬 수가 없는 것들로서, 미신적(迷信的)이고 죄악(罪惡) 된 올가미들이므로, 기독교(基督敎) 신자(信者)는 아무도 거기에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마 19:11,12; 고전 7:2,9; 엡 4:28; 벧전 4:2; 고전 7:23).


    제23장 국가(國家) 위정자(爲政者)

1. 국가적(國家的) 권세(權勢)의 원천(源泉)과 목적(目的)
 온 세상(世上)의 최고(最高)의 주(主)요 왕(王)이신 하나님께서는 위정자(爲政者)들을 세우셔서 자기(自己) 아래 두시고 자기(自己) 자신(自身)의 영광(榮光)과 공공(公共)의 유익(有益)을 위(爲)하여 백성(百姓)을 다스리게 하셨으며 이 목적(目的)을 위(爲)하여 그들에게 무력(武力=칼=公權力)을 허용(許容)하였으니 이는 선(善)한 자(者)들을 보호(保護)하고 격려(激勵)하는 한편 악(惡)을 행(行)하는 자(者)들을 벌(罰)하기 위함이다(롬 13:1-4; 벧전 2:13,14).

2. 그리스도인(基督人)의 공직(公職) 문제(問題)
 그리스도인(基督人)들이 공직자(公職者)로 임명(任命)될 때에 공직(公職)을 맡아 수행(修行)하는 것은 적법(適法)하다(잠 8:15,16; 롬 13:1,2,4). 그 직분(職分)에 종사(從事)함에 있어서 각(各) 나라의 건전(健全)한 법률(法律)에 따라 특별(特別)히 경건(敬虔)과 공의(公儀)와 평화(平和)를 유지(維持)하도록 해야 한다(시 2:10-12; 딤전 2:2; 시 82:3,4; 삼하 23:3; 벧전 2:13). 그 목적(目的)을 위(爲)하여 지금 신약(新約) 시대(時代)에는 정당(正當)하고 필요(必要)한 경우(境遇)에 전쟁(戰爭)을 일으키는 것은 정당(正當)하다(눅 3:14; 롬 13:4; 마 8:9,10; 행 10:1,2; 계 17:14,16).

3. 국가(國家) 위정자(爲政者)의 의무(義務)
 위정자(爲政者)는 말씀과 성례(聖禮)를 집행(執行)하거나(대하 26:18) 천국(天國) 열쇠의 권세(權勢)를(마 16:19) 자기(自己)들의 것으로 취(取)해서는 안 된다(요 18:36). 또는 그들이 조금이라도 신앙(信仰)의 문제(問題)에 대해서 간섭(干涉)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양육(養育)하는 아버지와 같이 우리의 참된 교회(敎會)를 보호(保護)할 의무(義務)가 있으며, 그럴 때에 참된 교회(敎會)의 어느 한 교파(敎派)를 다른 교파(敎派)들보다 우대(優待)하지 말고, 모든 교역자(敎役者)들이 그 신성(神聖)한 직책(職責)을 완전(完全)히 자유롭게 수행(修行)하며, 폭력(暴力)이나 위협(威脅)을 받지 않게 해야 한다(사 49:23).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자기(自己)의 교회(敎會) 안에 일정(一定)한 치리제도(治理制度)와 권징법(勸懲法)을 제정(制定)하셨으므로, 어떤 참된 교회(敎會)든지 자발적(自發的)인 교회원(敎會員)들이 그들의 신앙고백(信仰告白)과 신념(信念)에 따라 교회규율(敎會規律)을 시행(施行)할 때 국가(國家)의 법률(法律)이 간섭(干涉)하거나 허락(許諾) 또는 방해(妨害)해서는 안 된다(시 105:15). 정부(政府)의 책임자(責任者)들의 임무(任務)는 국민(國民)의 신체(身體)와 명예(名譽)를 보호(保護)해서, 신자(信者)나 불신자(不信者)가 구실(口實)이 되어 어느 누가 다른 사람에게 모욕(侮辱)이나 폭행(暴行)이나 학대(虐待)나 상해(傷害)를 가(加)하는 것이 허락(許諾)되지 않도록, 효과적(效果的)으로 처리(處理)하는 것이며, 모든 종교집회(宗敎集會)와 교회집회(敎會集會)를 아무 방해(妨害)나 소란(騷亂)이 없이 개최(開催)하도록 적당(的當)한 보호(保護)를 행(行)하는 것이다(삼하 23:3; 딤전 2:1-2; 롬 13:4).

4. 위정자(爲政者)에 대한 교인(敎人)의 의무(義務)
 위정자(爲政者)들을 위(爲)하여 기도(祈禱)하고(딤전 2:1,2) 그들의 인격(人格)을 존중(尊重)해 주며(벧전 2:17), 조세(租稅)와 그 밖의 공과금(公課金)을 바치고(롬 13:6,7) 그들의 적법(適法)한 명령(命令)에 복종(服從)하고 양심(良心)을 위(爲)하여 그들의 권한(權限)에 복종(服從)하는 것은 백성(百姓)들의 의무(義務)이다(롬 13:5; 딛 3:1). 신앙생활(信仰生活)을 하지 않거나 신봉(信奉)하는 종교(宗敎)가 다르다고 해서 그 위정자(爲政者)의 정당(正當)하고 적법(適法)한 권위(權威)를 인정(認定)치 않거나 순종(順從)치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벧전 2:13,14,16). 교회(敎會)의 직분(職分) 맡은 사람들이라고 해서 예외(例外)가 될 수 없다(롬 13:1; 왕상 2:35; 행 25:9-11; 벧후 2:1,10,11; 유 8-11). 하물며 위정자(爲政者)들이 통치권(統治權)을 행사(行事)하는 때에 교황(敎皇)이 그들에 대하여, 또는 그들의 백성(百姓)에 대하여 어떤 권한(權限)이나 사법권(司法權)을 가지는 것이 아니며, 만일 교황(敎皇)이 그들을 이단(異端)으로 정죄(定罪)하거나 또는 기타(其他)의 다른 구실(口實)로 그들의 통치권(統治權)이나 생명(生命)을 빼앗을 권한(權限)이 전혀 없는 것이다(살후 2:4; 계 13:15-17).


    제24장 결혼(結婚)과 이혼(離婚)

1. 일부일처(一夫一妻)의 원리(原理)
 결혼(結婚)은 한 남자(男子)와 한 여자(女子) 사이에 이루어져야 한다. 어떠한 남자(男子)이든 한(一) 명(名) 이상(以上)의 아내(妻)를 두는 것은 정당(正當)하지 않으며, 또한 어떠한 여자(女子)이든 한(一) 명(名) 이상(以上)의 남편(男便)을 동시(同時)에 두는 것은 정당(正當)하지 않다(창 2:24; 마 19:5,6; 잠 2:17)

2. 결혼(結婚)의 목적(目的)
 결혼(結婚)은 남편(男便)과 아내(妻)가 서로 돕도록 제정(制定)되었다(창 2:18). 또한 합법적(合法的)인 자손(子孫)들을 통(通)하여 인류(人類)가 번성(蕃盛)하고, 경건(敬虔)한 종자(種子)를 통(通)하여 교회(敎會)가 번성(蕃盛)하고(말 2:15), 부정(不貞)을 막기 위(爲)하여 제정(制定)된 것이다(고전 7:2,9).
3. 불신(不信) 결혼(結婚) 금지(禁止)
 결혼(結婚)에 응(應)할 수 있는 분별력(分別力)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결혼(結婚)할 수 있다(히 13:4; 딤전 4:3; 고전 7:36-38; 창 24:57,58). 그러나 그리스도인(基督人)들은 오직 주(主)안에서만 결혼(結婚)해야 할 의무(義務)가 있다(고전 7:39). 그러므로 참된 개혁(改革) 신앙(信仰)을 신봉(信奉)하는 자(者)는 불신자(不信者)들이나 로마 카톨릭 신자(天主敎信者)들이나 기타(其他)우상(偶像) 숭배자(崇拜者)들과 결혼(結婚)해서는 안 되며, 생활(生活) 면에서 노골적(露骨的)으로 사악(邪惡)하거나 저주(詛呪) 받을 만한 이단(異端)을 주장(主張)하는 자(者)들과 경건(敬虔)한 자(者)가 결혼(結婚)함으로 해서 멍에를 같이해서는 안 된다(창 34:14; 출 34:16; 신7:3,4; 왕상 11:4; 느 13:25-27; 말 2:11,12; 고후 6:14).

4. 친족(親族) 결혼(結婚) 금지(禁止)
 성경(聖經) 말씀으로 금(禁)해져 있는 혈족(血族)이나 인척간(姻戚間)에는 결혼(結婚)이 불가(不可)하다(레 18; 고전 5:1; 암 2:7). 그러한 사람들이 남편(男便)과 아내(妻)로서 함께 살게 되는, 그 같은 근친상간적(近親相姦的)인 결혼(結婚)은 어떤 인간(人間)의 법(法)이나 단체(團體)의 승인(承認)에 의해서도 적법(適法)한 것으로 되어 질 수가 없다(막 6:18; 레 18:24-28). 남자(男子)는 자기(自己) 자신(自身)의 골육지친(骨肉之親)뿐만 아니라 자기(自己) 아내(妻)의 골육지친(骨肉之親) 중(中)의 아무와도 결혼(結婚)해서는 안 되고, 여자(女子)도 자기(自己)자신(自身)의 골육지친(骨肉之親)뿐만 아니라, 자기(自己) 남편(男便)의 골육지친(骨肉之親)과 결혼(結婚)해서는 안 된다(레 20:19-21).

5. 이혼(離婚)과 재혼(再婚)
 약혼(約婚)한 후(後)에 범(犯)한 간음(姦淫)이나 간통(姦通)이 결혼(結婚) 전(前)에 발견(發見)되면, 무흠(無欠)한 측(側)에서 그 약혼(約婚)을 파기(破棄)할 수가 있다(마 1:18-20). 결혼(結婚)한 후(後)에 간음(姦淫)한 경우(境遇)는, 무흠(無欠)한 측(側)에서 이혼(離婚) 소송(訴訟)을 하는 것이 적법(適法)하며(마 5:31,32), 이혼(離婚)한 후(後)에는, 범죄(犯罪)한 측(側)이 죽은 경우(境遇)나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과 결혼(結婚)하는 것이 적법(適法)하다(마 19:9; 롬 7:2,3).

6. 이혼(離婚)
 인간(人間)의 마음은 부패(腐敗)한 까닭에, 하나님께서 결혼(結婚)을 통(通)해서 짝지어 주신 사람들을 갈라놓기 위(爲)하여 부당(不當)하게 이혼(離婚) 사유(事由)를 캐내는 경향(京鄕)이 있지마는, 간음(姦淫) 또는 교회(敎會)나 세상(世上)의 법률(法律)에 의(依)해서도 결코 어떻게 할 수 없는 고의적(故意的)인 별거(別居) 외(外)에는 어떤 것도 이혼(離婚)을 위(爲)한 충분(充分)한 사유(事由)가 될 수 없다(마 19:8,9; 고전 7:15; 마 19:6). 이혼(離婚)을 할 때에는 공적(公的)인 법적(法的) 절차(節次)를 밟아야 하며, 관련(關聯)된 당사자(當事者)들이 그들 자신(自身)의 사건(事件)에 있어서 자신(自身)의 의견(意見)이나 결정(決定)에 따라 자의(自意)로 처리(處理)해서는 안 된다(신 2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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