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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09-21 08:42
기독교강요(상) 제1부 제11장 교황주의자들의 우상숭배
 글쓴이 : 작은자
조회 : 3,885   추천 : 1  

제11장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형태(形態)로 만드는 것은 불신앙적(不信仰的)이다. 그리고 우상(偶像)을 세우는 자(者)는 일반적(一般的)으로 참되신 하나님을 배반(背反)하는 자(者)이다.

1. 하나님은 가시적(可視的) 형태(形態)로 자신(自身)을 표현(表現)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금(禁)하신다
성경(聖經)은 하나님과 거짓 신(神)들을 구별(區別)하고자 할 때에는 특별(特別)히 하나님을 우상(偶像)과 대립(對立)시키고 있다. 이것은 철학자(哲學者)들의 교묘(巧妙)한 가르침과 사람들이 하나님을 탐구(探究)하는데 자기(自己) 공론(空論)에 집착(執着)하고 우매(愚妹)하며, 발광(發狂)하게 된다는 것을 훌륭하게 폭로(暴露)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성경(聖經)은 인간(人間)이 자신(自身)의 생각으로 만들어낸 일체(一體)의 신성(神聖)을 무(無)로 돌린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자신에 대한 참된 증거자(證據者)가 되기 때문이다. 동시(同時)에 보이는 하나님을 갈망(渴望)하여 썩을 물질(物質)로 조형화(造形化) 하려는 야수적(野獸的)인 우매가 전(全) 세계(世界)를 붙잡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원리(原理)를 고수(固守)한다. 즉 “어떠한 형상이라도 하나님을 형상화하게 되면 불경건의 허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은 파괴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律法)에서, 하나님은 자신에게만 영광(榮光)이 돌려져야 한다고 요구(要求)하신 후,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출 20:4). 하나님은 자기(自己)를 보이는 형상(形象)으로 표현(表現)하려는 일체(一體)의 방자(放恣)한 행동(行動)을 억제(抑制)시키고, 페르시아의 태양신(太陽神), 애굽 사람들의 동물(動物), 희랍사람들의 인간형태(人間形態)의 하나님을 예배(禮拜)하려는 모든 생각들을 비교(比較)하시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그들 가까이 오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일체(一體)의 형상(形象), 화상(畵像), 그 밖의 상징물(象徵物)들을 예외(例外) 없이 거절(拒絶)하셨다.

2. 하나님을 조형적(造形的)으로 표현(表現)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存在)와 모순(矛盾)된다
하나님은 금령(禁令)을 통하여(신 4:15-18) 형상(形象)을 동경(憧憬)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배반(背反)하는 것임을 알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분명하게 형상(形象)을 적대시(敵對視)하여 말씀하셨는가를 우리는 알 수 있다. 이사야는 비물질적(非物質的)인 하나님을 물질적(物質的)인 것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형상(形象)으로, 영(靈)이신 하나님을 무생물(無生物)로, 무궁(無窮)하신 하나님을 나무 조각이나 돌, 혹은 황금 조각과 같은 것으로 만들 때, 하나님의 위엄(威嚴)은 부당(不當)하고 터무니없는 허상(虛像)으로 더럽히게 된다고 주장 한다(사 40:18-20, 41:7, 29, 45:9, 46:5-7). 바울도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技術)과 고안(考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행 17:29) 이 말씀은 인간(人間)이 세운 조상(造像)과 하나님을 나타내려고 그린 화상(畵像)은 모두 하나님의 위엄(威嚴)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마음을 불쾌(不快)하게 한다는 것이다.

3. 신적(神的) 임재(臨齋)의 직접적(直接的)인 표징(表徵)도 형상(形象)을 정당화(正當化)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결정적(決定的) 표징(表徵)에 의해서 때때로 자신의 신적(神的) 위엄(威嚴)의 임재(臨在)를 나타내 보이셨기 때문에, 성경(聖經)에서는 “대면하여”보이신 것으로 말하고 있다(출 33:11). 그러나 그가 보이신 지난날의 모든 표징(表徵)들은 모두 인간(人間)의 교육(敎育)을 위해서 적절(適切)히 고려(考慮)된 것이며, 동시에 그의 불가해(不可解)한 본질(本質)을 인간에게 명백하게 말해 주는 것들 이였다. 즉 “구름과 연기와 화염”(신 4:11)은 이것들이 하늘의 영광의 상징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제어(制御)하여 그 이상 파고들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모세도 하나님의 얼굴을 구(求)하는 기도(祈禱)를 응답(應答) 받지 못하고 단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고 하는 말씀을 받았을 뿐이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나타났는데(마 3:16), 이것은 그 비둘기의 곧 사라짐을 말하고, 이 순간적인 상징(象徵)으로 말미암아 신자(信者)들이 성령을 눈에 보이는 분으로 믿는 것을 경고(警告) 받고, 성령(聖靈)의 권능(權能)과 은혜(恩惠)로 만족(滿足)하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때때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것은, 그가 장차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啓示)하실 것에 대한 서곡(序曲)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형태(形態)로 신격(神格)의 상징(象徵)을 세우려는 어떠한 구실(口實)도 유대인들에게 절대(絶對)로 허용(許容)되지 않았던 것이다.

4. 형상(形象)과 화상(畵像)은 다같이 성경(聖經)과 반대(反對)된다
성경(聖經)이 반복적(反復的)으로 경고(警告)하는 것은 무한(無限)하시며 불가해(不可解)하신 하나님을 인간(人間)들의 지혜(知慧)와, 그 들의 기술(技術)을 통하여 5척의 키로 축소(縮小)시키기를 즐겨 하는 망령(妄靈)된 생각들이다. 어느 이교시인(異敎詩人)은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한때 나는
무화과나무의 줄기, 쓸모없는 나무 조각이었네.
공장(工匠)은 나를 걸상으로 만들까 망설이다가
마침내
신(神)으로 만들기로 결정하였네.

성경(聖經)은 우상(偶像)은 “자기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하나님의 권위(權威)가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사 2:8, 31:7, 37:19; 호 14:3; 미 5:13). 이 말씀으로 보아 인간(人間)이 고안(考案)해 낸 일체(一體)의 예배형태(禮拜形態)는 가증스러운 것이라는 것이 확립(確立)된다. 인간(人間)은 오직 만사(萬事)가 하나님의 권능(權能)에 의해서 이루어짐을 알 수 있도록 부여(附與)받은 지성(知性)을 소유(所有)하고 있음에도 생명(生命)이 없고 무감각(無感覺)한 사물(死物)에게서 도움을 요청(要請)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의(注意)해야 하는 것은 화상(畵像)도 조상(造像)과 못지않게 금지(禁止)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와 같이 조상(造像)을 세우는 것 뿐 아니라 조형(造形)하는 것도 금지(禁止)하였다. 이것은 그와 같이 하나님을 표현(表現)하는 것은 거짓이요, 하나님의 위엄(威嚴)을 모독(冒瀆)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5. 우상(偶像)에 대한 성경(聖經)의 판단(判斷)
그레고리우스(Gregorius)의 말에 ‘우상은 무식한 사람들의 책’이라고 하였으나, 그가 성령(聖靈)의 학교(學校)에서 배웠더라면 그러한 주장(主張)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레미야는 “우상의 도는 나무뿐이라”(렘 10:8)고 하였고, 하박국은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합 2:18)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표현(表現)하기 위하여 보이는 형상(形象)을 만드는 일은 사악(邪惡)한 일이요, 거짓이다.

6. 교회(敎會)의 교리(敎理)도 우상(偶像)에 대하여 달리 판단(判斷)한다
이 외에도 락탄티우스(Lactantius)와 유세비우스(Eusebius)가 쓴 글은 형상(形象)으로 보이는 것은 모두가 다 가사적(可死的)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주장한다. 어거스틴(Augustine)도 이와 마찬가지로, 형상(形象)에게 예배(禮拜)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형상(形象)을 하나님께 봉헌(奉獻)하는 것은 죄악(罪惡)이라고 명백(明白)하게 주장하였다. 그는 또 “신들의 조상들을 최초로 소개한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敬畏)를 제거(除去)하고 그 대신 오류(誤謬)를 가하였다”라고 바르로(Varro)의 말을 인용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을 바로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은, 형상(形象) 이외에 다른 자료(資料)에서 배워야 한다.

7. 교황주의자(敎皇主義者)들의 형상물(形像物)은 전적(全的)으로 잘못된 것이다
교황주의자(敎皇主義者)들이 조금이라도 수치를 느낄 줄 안다면, 형상물(形象物)이 무식(無識)한 자(者)의 책(冊)이라고 하는 속임수를 써서는 안 될 것이다. 그 것은 성경(聖經)의 많은 증거(證據)에 의하여 명백하게 반박(反駁)되었기 때문이다. 실로 그들의 교회(敎會)에서 동정녀(童貞女)의 조상(彫像)이라고 여겨지기를 바라는 형상물(形象物)보다는 오히려 창녀(娼女)의 복장(服裝)이 더 정숙(貞淑)하고 순수(純粹)하게 보인다. 그들은 순교자(殉敎者)들에게 좀 더 잘 입힐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황주의자(敎皇主義者)들이, 우상(偶像)은 일종의 성결(聖潔)의 책이라고 하는 그 거짓된 주장을 조금이라도 순수(純粹)하게 보이기를 원한다면, 적어도 그들의 우상(偶像)을 적당하게 장식(裝飾)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나님은 여기서 그 쓰레기 같은 것과는 전적(全的)으로 다른 교리(敎理)를 배우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말씀의 전파(傳播)와 성례(聖禮)를 통하여 한 공통(共通)된 교리(敎理)가 모든 사람에게 제시(提示)되기를 명(命)하셨던 것이다. 실로 가르치는 교회(敎會)의 지도자(指導者)들이 가르치는 임무(任務)를 우상(偶像)에게 넘겨주고 교육(敎育)하기에 적합(適合)했던 교리(敎理)를 탈취 당한 데서 온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들은 누구인가? 그 무식(無識)한 자(者)들은 누구인가? 바로 그들은 주님께서 자기 제자(弟子)로 인정(認定)하신 자들이며, 하늘나라의 철학(哲學)의 계시(啓示)로 옷을 입힌 자(者)들이며, 또한 천국(天國)의 구원(救援)의 신비(神秘)로 교육(敎育)받기를 원하는 자들이다 그들이 무식(無識)한 벙어리였다는 것 외에 다른 이유(理由)가 없다. 바울은 이 복음(福音)을 진실하게 전파(傳播)하면서“그리스께서 십자가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갈 3:1)라고 증거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저주(詛呪)를 대신해서 십자가(十字架)상에서 죽으시고(갈 3:13), 자기의 육체(肉體)를 희생하여 우리 죄(罪)를 속(贖)하시고(히 10:10), 자기의 보혈(寶血)로 우리를 깨끗이 씻어 주시고(계 1:5) 우리를 성부(聖父) 하나님과 화목(和睦)케 하셨다는 것을(롬 5:10), 진실하게 배웠다면 대체 무슨 목적(目的)으로 나무와 돌과 금, 은으로 그렇게 많은 십자가상(十字架象)을 교회(敎會) 도처(到處)에 세웠겠는가? 하나님 교리(敎理)만으로도 천 개의 십자가상(十字架象)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 않겠는가? 탐욕(貪慾)적인 사람들의 눈과 마음은 저것들에게 집착(執着)하고 있다.

8. 형상(形象)의 기원(紀元) : 유형적(類型的)인 신격(神格)에 대한 인간(人間)의 욕구(欲求)
우상(偶像)의 기원(紀元)에 대하여 잠언은 말하기를 우상(偶像)을 처음으로 창시(創始)한 자(者)들은 죽은 자를 존경(尊敬)한 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죽은 자를 기념(記念)하기 위하여 그들을 미신적(迷信的)으로 예배(禮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교(異敎)의 저술가(著述家)들이 사자상(死者像)을 신성시(神聖視)하려는 열망(熱望)이 있기 오래 전에 벌써 우상(偶像)이 사용(使用)되고 있었다는 것을 모세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모세는 라헬이 그 아버지의 우상(우상)을 훔쳤다고 말하면서 흔히 있는 죄악(죄악)으로 기록(기록)하고 있다(창 31:19). 그러나 홍수(洪水) 이후(以後)에도 멋대로 신(神)들을 만들어 냈고, 아브라함이 태어나기도 전에 데라와 나홀은 거짓우상(偶像)을 섬긴 자(者)들이다(수 24:2). 인간(人間)의 마음은 교만(驕慢)과 무모(無謀)한 것으로 가득 차 있어 감히 신(神)들을 만들어 낸다. 또한 인간(人間)들은 그 손으로 하나님을 표현(表現)해 보려고 하고, 마음은 우상(偶像)을 잉태(孕胎)하고 손으로는 그 우상(偶像)을 만들어 낸다. 하나님께서 자신(自身)을 유형적(類型的)으로 나타내시지 않는 한, 인간(人間)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啓示)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 곧 우상숭배(偶像崇拜)의 기원(紀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9. 형상물(形象物)의 사용(使用)은 마침내는 우상숭배(偶像崇拜)에 빠지게 한다
이런 종류(종류)의 공상(空想) 뒤에는 즉시 예배(禮拜)가 따르게 되는데, 인간(人間)이 형상(形象) 속에서 하나님을 본다는 마음에 그 형상(形象)에 예배(禮拜)하게 되는 것이다. 그 형상(形象)이 우상(偶像)이 되어 마음과 눈이 전적(全的)으로 우상에 얽매이며, 무력(無力)하여 져서 그 우상 속에 무엇인가 신적(神的)인 요소(要素)가 있는 것 같은 감탄 속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나 어떤 피조물(被造物)을 상(像)으로 표현(表現)하여 이를 예배(禮拜)하기 위하여 그 앞에 꿇어 엎드릴 때에는 벌써 미신(迷信)에 매혹(魅惑)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理由)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표현하기 위하여 조상(造像)을 만들어 세우는 것과, 예배(禮拜)로 유도할 만한 비문(碑文)이나 석비(石碑), 어떠한 봉헌(奉獻)도 금(禁)하셨던 것이다(출 20:25). 여하간 우상(偶像)에게 하나님의 존영(尊榮)을 부여(附與)하는 것은 우상숭배(偶像崇拜)이다. 그러나 우상숭배를 옹호(擁護)하는 자들은 그들이 세운 형상(形象)을 신(神)으로 간주(看做)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유대인들도 금송아지를 만들기 전에는(출 32:4),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손으로 그들을 인도해 내셨다고 잊어버릴 정도로 무분별(無分別)하지는 않았다(레 26:13). 그러나 뻔뻔한 그들은 그들 앞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금송아지에서 볼 수만 있다면 하나님을 그대로 존속(存續)시키기를 원한다고 말한다(출 32:4,8). 한편 이방인(異邦人)들도 신(神)들이 하늘에 거주(居住)한다고 상상(想像)하고 그들에게 예배(禮拜)하였던 것이다.

10. 교회(敎會)에서의 형상물(形像物) 예배(禮拜)
오늘날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려지기를 원(願)하는 자(者)들이 우상(偶像) 앞에 엎드려 부복(俯伏)하고, 그 우상(偶像)을 향(向)해 기도(祈禱)하며, 하나님의 귀로 향(向)하는 것처럼 우상(偶像)에게 향(向)한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는 결코 우상을 우리의 신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언자(預言者)들은 끊임없이 그들이 목석(木石)으로 더불어 간음(姦淫)한다고 비난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렘 2:27; 겔 6:4; 사 40:19-20; 합 2:18-19; 신 32:37). 그들은 나무와 돌로 하나님을 만들어 놓고 예배(禮拜)드리고 있는 것이다.

11. 교황주의자(敎皇主義者)들의 어리석은 회피(回避)
교황주의자(敎皇主義者)들은 형상물(形象物)에게 표시(表示)하는 존경(尊敬)을 우상(偶像)에게 봉사(奉仕)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우상(偶像)을 예배(禮拜)하는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우상(偶像)에게 봉사(奉仕)할 뿐이라는 명목(名目)으로 죄(罪)를 피하려고 하나 이것은 마치 ‘형상을 예배하고 있지만 예배는 아니다’라는 고백(告白)을 의미(意味)한다. 이들은 희랍어에서 피할 길을 찾으나 유치한 방법이다. 왜냐하면 ‘라트류에인’이라는 말은 ‘예배하다’라는 뜻을 지니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의 무식(無識)을 나타내는 것이다. 결국 이들은 간음(姦淫)하는 자나 살인자(殺人者)가 자기(自己)들의 죄(罪)의 명(名)을 변경(變更)한다고 해도 그의 죄책(罪責)을 면(免)할 수 없는 것과 같다.

12. 예술(藝術)의 기능(技能)과 한계(限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어떠한 형상(形象)이나 조각(彫刻), 회화(繪畵)로서 표현(表現)하는 것을 금(禁)하셨기 때문에(출 20:4) 하나님을 가시적(可視的)인 모양으로 표현(表現)하는 것은 불법(不法)이라고 생각한다. 즉 인간(人間)의 시야(視野)를 초월(超越)하시는 하나님을 가시적(可視的)으로 표현(表現)된 것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역사적(歷史的)인 것과 사건(事件)이요, 하나는 역사적(歷史的)인 사건(事件)과는 아무 관계(官界)도 없는 것이다. 전자(前者)는 교육(敎育)하는데 다소 유익(有益)이 되나, 후자(後者)는 바로 쾌락(快樂) 외에는 아무 것도 주지 못한다. 화가(畵家)와 조각가(彫刻家)들이 이 작업(作業)에서 얼마나 방탕(放蕩)하게 탕녀(湯女)의 역할(役割)을 하였는가? 아무런 가치(價値)도 없는 것들이 교회(敎會) 내에 장식(裝飾)되어 있다.

13. 교리(敎理)가 순수(純粹)하고 건전(健全)할 때에는 교회(敎會)가 형상물(形象物)을 거절(拒絶)하였다
과거사(過去事)의 표현(表現)이든 인간(人間)의 신체(身體)를 만들어 놓은 것이든 간에, 어떠한 형상(形象)을 교회당(敎會堂) 안에 두는 것이 과연 마땅한지에 대해 검토(檢討)해 보자. 첫째로 초대(初代) 교회(敎會)의 권위(권위)에 감동(感動)을 받고 교리(敎理)가 순수(純粹)하고 번창(繁昌)하던 약 500년 동안, 기독교회(基督敎會)에는 형상물(形象物)이 없었다는 사실(事實)을 기억(記憶)하자. 그러나 성직(聖職)의 순수성(純粹性)이 점점 쇠퇴(衰退)하여 감에 따라, 교회(敎會)를 장식(裝飾)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그 장식들이 소개(紹介)되었다. 그 최초(最初)의 자(者)들의 의도는 알 수는 없으나 전시대(前時代)에 비(比)하여 후시대(後時代)가 심히 타락(墮落)하였다는 사실(事實)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교부(敎父)들이 유용(有用)하고 유익(有益)한 것들은 그렇게 오랜 동안을 없이 지내도록 하였겠는가? 심사숙고(深思熟考)한 끝에 상당한 이유(理由)를 가지고 그것들을 거절(拒絶)하였다. 어거스틴도 이러한 사실을 명백한 어조(語調)로 다음과 같이 진술(陳述)하였다. 즉 형상물(形象物)을 숭고(崇古)하고 높은 자리에 두게 되면 ‘기도(祈禱)하는 사람과 제물(祭物) 드리는 사람의 주위를 끌게 되고 그것이 비록 감각(感覺)과 생명(生命)은 없다 하더라도 생명 있는 지체(肢體)와 감각(感覺) 있는 것과 흡사(恰似)해져, 유약(幼弱)한 마음을 감동(感動)시키게 되고 마침내는 그것들이 살아서 호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하고, 또 ‘우상(偶像)이 수족(手足)의 형태(形態)를 가지고 있으므로, 육체(肉體) 안에 머물고 있는 마음은 그것이 자신(自身)의 육체(肉體)와 너무나 비슷하게 보이기 때문에 우상(偶像)의 형태(形態)도 감각(感覺)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며, 또 어떤 의미(意味)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며 ‘우상은 불행한 영혼을 굴복시키기는 하지만 불행한 영혼을 회복시키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우상은 말하지도 못하며 보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보라! 교황주의자(敎皇主義者)들의 말을 믿게 되면 소위 형상물(形象物)들의 혜택(惠澤)을 받게 될 것이다.

14. 니케아 회의(787년)에서의 형상물(形象物)에 대한 유치한 논쟁(論爭)
이 문제(問題)에 대(對)하여 충분(充分)히 위에서 설명(說明)했지만, 나의 관심(觀心)을 끌기 때문에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 니케아 회의(Nicene Council)는 유명한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tine the Great)가 소집(召集)했던 325년의 회의(會議)가 아니고, 이레네 황후(Empress Irene)의 명령(命令)으로 개최(開催)된 회의(會議)를 말한다. 이 회의(會議)에서 교회당(敎會堂) 안에 형상(形象)을 설치(設置)할 뿐만 아니라 이 형상물(形象物)에 예배(禮拜)까지 드리도록 결정(決定)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보다는 형상물(形象物)에 더 큰 애착을 갖는 발광(發狂)하는 자(者)들이 니케아 회의(會議)가 그들을지지(支持)한다고 끝까지 주장(主張)하나, 샤를마뉴 대제(Charlemagne, Carolus Magnus)의 반박문(反駁文)에는, 동방교회(東方敎會)의 사절(使節)인 요한은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창 1:27)고 주장하고 우리는 마땅히 형상물(形象物)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어떤 사람은 형상물을 제단(祭壇) 위에 두어야 한다는 말을 증명(證明)하기 위하여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위에 두나니(마 5:15)라는 말씀을 인용하기도 하였다. 어떤 이는 형상(形象)들을 우러러보는 일이 우리에게 유익(有益)하다는 말을 보이려고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시 4:6)라는 시편을 인증(認證)하였다. 그 외에도 많은 곡해(曲解)가 있었으나,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요일 1:1)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석(解釋)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의 말씀을 들어서 만이 아니라 형상물(形象物) 들을 정관(靜觀)함으로써 알게 된다는 것이다.

15. 성경(聖經) 본문(本文)에 대한 엉뚱한 오용(誤用)
그들이 예배(禮拜)에 대(對)하여 논(論)할 때에는 반드시 야곱이 바로 왕을 축복(祝福)한 것(창 47:10), 야곱이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창 47:31; 히 11:21)한 것, 야곱이 스스로 세운 돌비에 기름 부은 것 등을 들추어낸다(창 28:18). 그러나 이들 중 세 번째 경우에 있어서 성경(聖經)어디에도 없는 주장이다. 또한 그들은 “그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 지어다”(시 99:5), “그 성산 에서 경배할지어다”(시 99:9), “백성 중 부한 자도 네 은혜를 구하리로다”(시 45:12)등을 적절(適切)한 구절(句節)로 들고 나오나 이 이상 어리석음이 어디 있겠는가? 이제 니케아 회의(會議)의 결정(決定)을 역설(力說)해야 할 것이다. 유치하고 악랄(惡辣)한 자신(自身)들의 신용(信用)을 상실(喪失)한 자(者)들이여...

16. 형상물(形象物)에 대(對)한 모독적(冒瀆的)이며 무서운 주장(主張)
나는 이제 가공(可恐) 할 만한 신성모독(神性冒瀆)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이러한 최고(最高)의 혐오감(嫌惡感) 앞에 그들에게 대항(對抗)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교황주의자(敎皇主義者)들이 내세우는 형상예배(形象禮拜)는 제거(除去)되어야 한다. 아모리 감독 데오도시우스는 형상예배(形象禮拜)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파문(破門)하고, 어떤 이 는 동방(東方)나라가 당한 일체(一體)의 재난(災難)이 형상예배(形象禮拜)를 하지 않은 탓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마침내 모든 이단자(異端者)들 보다 사마리아인들이 더 나쁘고, 이들보다도 형상예배(形象禮拜)를 반대(反對)하는 자(者)들이 더 나쁘다고 하였다. 그들은 박수갈채를 받기 위해 ‘그리스도 상(像)을 가지고 그것에 제물(祭物)을 바치는 자(者)는 기뻐 날 뛰어라’는 구절(句節)을 첨가(添加)하였다. 그들은 형상물(形象物)과 하나님을 동일(同一)하게 다루고 있다.


작은자 11-09-22 09:53
 
<참고 사항입니다>
제1차 니케아공의회(Councils of Nicaea)는 주후 325년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소집하였다. 회의(會議)의 목적(目的)은 아리우스 논쟁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정(否定)하는 아리우스파(派)를 이단(異端)으로 단죄(斷罪)하여 분열(分列)된 교회(敎會)를 통일(統一)시키고, 로마제국의 안정(安定)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회의(會議)는 거의 두 달간 계속되었고 318명의 감독(監督)들이 참석(參席)하였다.

제2차 회의(會議)는 주후 787년에 제7차 공의회로 열렸다. 당시 섭정(攝政)이던 동로마제국의 황후 이레네 2세가 총대주교 타라시우스를 책동하여 소집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성화상(聖畵像)숭배, 남녀공주수도원(男女共住修道院)의 금지(禁止) 등에 관한 조규(條規) 20개 조가 의결(議決)되었다. 그러나 성화상(聖畵像)에 관한 교리(敎理)는 서유럽 교회(敎會)들의 반발(反撥)로 인해서 얼마 동안 그 승인(承認)이 보류(保留)되었다.
이 공의회에서 교회는 "성화에 바치는 공경은 성화에 그려진 성인들에 대한 것이지, 성화를 숭배(崇拜)하는 게 아니므로, 성화공경(聖畵恭敬)은 절대(絶代) 우상숭배(偶像崇拜)가 아니다."라고 결론(結論)을 내렸다

거짓은 언제나 참을 가장합니다
혼란한 때에 더욱 진리를 따라 영적 분별력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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