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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09-14 10:16
기독교강요(상) 제1부 제8장 성경의 신빙성
 글쓴이 : 작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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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인간의 이성(理性)이 허용(許容)하는 한도(限度) 내에서 성경(聖經)의 신빙성(信憑性)은 충분(充分)히 증명(證明)된다.

1. 성경(聖經)은 인간의 모든 지혜(知慧)보다 뛰어나다.
인간(人間)의 저작(著作)이 아무리 기교(技巧)면에서 잘 다듬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성경(聖經)만큼 감동(感動)을 줄 수 없다는 사실에서 성경의 이 특수(特殊)한 힘은 명백해 진다. 더욱이 우리가 성경을 예찬(禮讚)한다고 생각 될 때 우리의 마음은 더욱 강한 확신(確信)을 가지게 된다. 이는 천국(天國)의 그 숭고(崇高)한 신비(神秘)가 대부분 평범(平凡)하고 겸손(謙遜)한 언어(言語)로 표현(表現)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特別)한 섭리(攝理)가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의 진리(眞理)의 힘이 너무나도 강력(强力)하기 때문에, 말의 기교(技巧)가 필요 없다는 것 외에 또 무슨 결론(結論)을 내릴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고린도인의 신앙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고전 2:5)에 있다고 주장(主張)한 사도(使徒)의 말은 정당(正當)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을 향(向)하여 증거(證據)한 그의 설교(說敎)는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聖靈)의 나타남과 능력(能力)으로”(고전 2:4)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人間)의 노력(勞力)으로 얻게 되는 재능(才能)과 미덕(美德)을 훨씬 능가(凌駕)하는 이 성경(聖經)은 신적(神的)인 무엇을 호흡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2. 결정적(決定的)인 것은 문체(文體)가 아니라 내용(內容)이다.
선지자(先知者)들 중 어떤 이들의 글은 우아하고 명쾌(明快)하며 심지어는 화려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그들의 수사법(修辭法)은 어떠한 세속적(世俗的)인 저자(著者)들에 비해서 손색이 없음을 나는 인정(認定)한다. 문체(文體)의 소박한 이들의 글을 읽어보면 성령(聖靈)의 위엄(威嚴)이 어디서고 뚜렷하게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탄이 교묘(巧妙)한 탈을 쓰고 천박한 언어(言語)로써 인간들의 마음속에 교활하게 불경(不敬)스러운 마음을 심어, 우리 인간을 속인다. 그리고 사탄은 진부(眞否)한 언어(言語)의 형식(形式)을 사용(使用)하고, 또 그의 가면을 쓰고 자신의 행각(行脚)을 감추려 한다. 그러나 성경(聖經)에 관한 한, 완고(頑固)한 사람들이 아무리 성경을 헐뜯고자 해도, 그 안에는 인간의 힘으로는 이해(理解) 할 수 없는 사상(思想)으로 가득 차 있음을 분명(分明)하게 알 수 있다.

3. 성경(聖經)의 고전성(古典性)
희랍의 저작자(著作者)들이 애굽신화(神話)에 대하여 많이 말하고 있지만, 실상(實像)은 모세 시대 것 보다 훨씬 후대(後代)의 것 외에는 종교(宗敎)의 유적(遺蹟)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성경(聖經) 그 자체(自體)는 적지 않은 중요성(重要性)을 가지고 있다. 물론 모세도 새로운 하나님을 고안(考案)해 낸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자기네 조상(祖上)들로부터 전해 내려온 영원(永遠)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받아 들였던 것을 선언(宣言)한 것에 불과(不過)하다.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맺은 그들의 언약(言約)을 생각나게 한 것 외에는 더 무엇이겠는가? 그들은 노예(奴隸) 생활을 알고 있었고, 400년이라는 년 수를 알고 있었기에 그들은 모세의 시간적(時間的)으로 앞서가는 전승(傳承)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聖經)이 고전성(古典性)에 있어서 다른 모든 책(冊)보다 얼마나 우수(優秀)한 것인가를 우리는 생각해야 할 것이다.

4. 모세의 예증(例證)이 보여주는 성경(聖經)의 진실성(眞實性)
이집트인들이 자기네의 고대기원(古代紀元)을 세계창조(世界創造) 이전 6천년(千年)까지 소급하여 올라가는 것을 믿으려 하고 있으나, 세속적(世俗的)인 저자(著者)들까지도 이 이론(理論)을 거부(拒否)하므로 구태여 논(論)하지 않기로 한다. 그러나 사악(邪惡)한 자들로 하여금 의혹(疑惑)을 품지 못하게 하고, 악(惡)한 자(者)들로 하여금 변명(辨明)의 어떤 기회를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위험(危險)에 대비한 최선(最善)의 구제책(救濟策)을 강구(講究)하신다. 야곱이 300년 전에 영감(靈感)을 받아 자기 자손(子孫)에 대하여 언급한 것을 모세가 상기(想起)하고 있지만, 그는 어떠한 방법(方法)으로 자기종족(自己種族)을 고귀(高貴)하게 하였는가? 자기 조상이 전적(全的)으로 혐오(嫌惡)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성령(聖靈)의 감동(感動)으로 말하였고, 자기 개인(個人)의 이해관계(利害關係)에 대하여는 조금도 생각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로부터 심한 미움까지 받게 될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모세가 아닌가? 더욱이 그는 최고(最高)의 권위(權威)에 있으면서도 어찌하여 자기의 아들들을 대제사장(大祭司長)의 자리에 앉히지 않고 오히려 가장 낮은 자리에 떨어뜨렸는가? 우리는 모세가 하나님의 사자(使者)로서 보내심을 받았다는 분명(分明)한 확신(確信)을 갖게 되는 것이다.

5. 이적(異蹟)은 하나님의 사자(使者)의 권위(權威)를 강화(强化)시킨다.
모세는 많은 이적(異蹟)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이 이적들은 그가 말한 율법(律法)과 공포(公布)한 교리(敎理)들에 대하여 확증(確證)하는 바다. 그가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다는 것, 그곳에서 40일 동안 사람과 교제(交際) 없이 있었다는 것(출 24:18), 율법(律法)을 선포(宣布)할 때 그의 얼굴에 광채(光彩)가 났다는 것(출 34:29), 장막(帳幕)의 입구(入口)가 가리워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는 것(출 40:34)등 수많은 이적들은 모세가 참된 선지자(先知者)였다는 증거(證據)가 아니겠는가? 모세가 회중(會衆)들 앞에 나타나서 그들의 죄(罪)를 책망(責望)하면서, 그들이 본 일도 없는 이적으로 직접 그들의 눈앞에서 자기교리(自己敎理)를 확신(確信)시킬 수 있었겠는가? 또한 그것을 자랑할 수 있겠는가?

6. 모세의 이적(異蹟)에는 논란(論難)의 여지(餘地)가 없다.
모세의 이적(異蹟)을 보이기만 하면 무슨 기회(機會)를 잡아 온 회중(會衆)을 선동(煽動)하려는 악독(惡毒)한 자(者)들은, 그의 이러한 이적들이 마술(魔術)에 의(依)한 것이라고 비방(誹謗)하였다(출 7:11, 9:11). 그러나 모세는 신접(神接)한 자(者)와 점(占)쟁이에게 묻는 자를 돌로 치라고 할 정도로 미신(迷信)을 증오(憎惡)하였다(레 20:6). 악(惡)한 사기(詐欺)꾼들은 속임수로 명성(名聲)을 얻으려고 노력(勞力)한다. 모세는 어떠했는가. 자기(自己)와 형(兄) 아론은 하나님의 명령(命令)을 수행(修行) 할 뿐 아무 것도 아니라고 공언(公言)함으로서 일체(一體)의 표적(表迹)을 지워 버렸다(출 16:7), 어떠한 마술사(魔術師)가 백성들의 식량(食糧)을 매일(每日) 적량(適量)을 공급(供給)할 수 있겠으며, 초과(超過)된 적량을 부패(腐敗)케 할 수 있으며, 불신자(不信者)로 하여금 하나님의 벌(罰)을 받게 할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의 이 거룩한 종(從)을 넘어뜨리려는 소수(小數)의 음모(陰謀)가 끊임없는 가운데, 모세의 속임수가 어떻게 그들의 횡포(橫暴)를 피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이러한 방법(方法)으로 그의 교훈(敎訓)이 모든 시대(時代)에 확신(確信)을 주었다는 사실을, 그 결과(結果)가 명백(明白)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7. 예언(預言)은 인간(人間)의 기대(期待)와는 다르게 성취(成就)된다.
야곱을 통하여 유다 지파에 최(最) 우위(優位)를 돌리게 한 것이 예언(預言)의 영(靈)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否定)할 수 없을 것이다. 그 결과가 입증(立證)하는 대로 그 사실 자체(自體)를 생각해 본다면 특히 분명(分明)하게 될 것이다(창 49:10). 이 예언(預言)을 최초(最初)로 말한 자가 모세였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나 그가 이 책(冊)을 기록(記錄)한지 400년이 지났지만 아직 유다 지파의 왕권(王權)에 대하여는 아무런 언급(言及)이 없지 않은가? 사울이 즉위(卽位)하고 나서 왕권(王權)은 베냐민 지파에 머무는 것 같이 보였으나(삼상 11:15),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을 때(삼상 16:13), 이때 왕권(王權)은 양치는 평민(平民), 그것도 7형제(兄弟)나 있었는데, 이것은 인간(人間)의 재간(才幹)이나, 혹은 사람의 생각으로 될 수 있었겠는가? 모세는 희미하기는 하지만 이방인(異邦人)들도 하나님의 언약(言約) 속에 들어온다고 말한바 있는데(창 49:10), 이 예언(預言)은 그 후 2000년이 지나서 성취(成就)되었다.

8. 하나님은 예언(預言)의 말씀을 확증(確證)하셨다.
이사야 시대(時代)의 유다 왕국(王國)은 평화(平和)로 왔고 심지어는 그들 자신이 갈대아인들의 동맹국(同盟國)이라 하여 스스로 안전(安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사야는 그 도시(都市)가 파괴(破壞)되며 그 백성(百姓)이 포로(捕虜)가 될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예언(預言)했다(사 39:6-7). 당시(當時)는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실제적(實際的)으로 이루어졌고, 또한 그들의 해방(解放)에 대해서도 동시(同時)에 예언(預言)했는데, 그렇다면 이 예언의 근원(根源)이 하나님이외에 도대체 어디서 왔단 말인가. 그는 고레스라는 이름을 들면서(사 45:1), 갈대아인들이 이 고레스에게 항복(降服)하며 그로 인해서 백성들이 자유(自由)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다고 예언(預言)했던 것이다. 이 예언 후(後)에 고레스가 태어나기까지는 100년 이상이 경과(經過)했다. 왜냐하면 이사야가 죽은 지 거의 100년이 지나서 고레스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아무도 예측(豫測)할 수 없는 이 예언(預言)은 하나님의 확실(確實)한 말씀으로 했다는 증거(證據가 되는 것이다. 또한 백성들이 잡혀가기 얼마 전에 예레미야는 잡혀간 백성들이 70년 동안의 포로생활(捕虜生活)이 될 것이라고 예언(預言)했는데(렘 25:11-12), 이 사실이야말로 하나님의 영(靈)의 지배하(支配下)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9. 율법(律法)의 전승(傳承)
어떤 악(惡)한 자(者)들은 모세가 실재(實在)의 인물(人物)이었는가를 감히 문제(問題) 삼으며 묻고 있다. 그러나 만일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또는 키케로 같은 인물이 실재(實在)로 있었는가를 의심(疑心)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마땅히 어리석음에 대하여 응징(膺懲)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모세의 율법(律法)은 인간(人間)의 노력(勞力)에 의해서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섭리(攝理)에 의(依)해 이적적(異蹟的)으로 보존(保存)되었다. 비록 게으른 제사장(祭司長)들에 의하여 파묻혔으나, 경건(敬虔)한 왕(王) 요시아가 이를 발견(發見)한 후(後)부터(왕하 22:6; 대하 34:15) 대대로 계속해서 계승(繼承)되어 왔다. 요시아가 이를 공포(公布)할 때에, 생소(生疎)한 것이 아니라 이미 백성들이 잘 알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요시아는 그 원본(原本)은 성전(聖殿)에 보존(保存)하고 사본(寫本)을 만들어 왕(王)의 서고(書庫)에 두게 하였다.

10. 하나님께서는 율법(律法)과 예언자(預言者)를 이적적(異蹟的)으로 보존(保存) 하셨다
마카비가(家)의 역사(歷史)에 있는 어떤 구절을 가지고 성경(聖經)의 진정성(眞正性)을 손상(損傷)시키려는 자(者)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의 거짓된 주장(主張)을 깨끗이 일소(一掃)해 버리고, 그들의 주장을 반격(反擊)할 것이다. 그들은 안티오쿠스(Antiochus)가 모든 책을 다 불태우라고 명(命)하였는데, 우리가 가진 사본(寫本)들이 도대체 어디서 나왔느냐고 말한다(마카비전서 1:56-57). 그러나 그 사본들이 어떤 공장(工場)에서 그렇게 빨리 위조(僞造)될 수 있었느냐고 반문(反問)하고 싶다. 왜냐하면 박해(迫害)가 가라앉자 즉시 그 책(冊)들이 나타났으며, 그 교리(敎理)에 대하여 교육(敎育)을 받고 이를 익숙히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이 아무런 논쟁(論爭)도 없이 이 책들이 성경(聖經)이라고 인정(認定)하였던 사실은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파렴치한 사람들이 유대인들을 모욕(侮辱)하였지만, 아무도 감히 그들이 성경(聖經)을 위조(僞造)했다고 비난한 사람은 없었다. 하나님의 놀라운 보존방법(保存方法)에 의하여 안티오쿠스의 피비린내 나는 포고령(布告令) 속에서 언약(言約)의 서판(書板)들을 건져내셨다는 놀라운 사실(事實)과, 유대인들의 거듭되는 재난(災難)속에서도 그 기록(記錄)들이 본래(本來)대로 안전(安全)하게 보존(保存)되어서 곧바로 헬라어 성경(聖經)이 나왔고 전(全) 세계(世界)에 보급(普及)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통(通)하여 보존(保存)하셨는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최대(最大)의 숙적(宿敵)인 유대인들, 곧 어거스틴이 기독교회(基督敎會)의 “서적상”(書籍商, bookman)이라고 적절(適切)히 칭한 바로 유대인들이다.

11. 신약성경(新約聖經)의 단순성(單純性)과 천적(天的) 특성(特性) 및 그 권위(權威)
신약성경(新約聖經)의 진리(眞理)가 얼마나 튼튼한 지주(支柱)로 유지(維持)되는가를 알게 된다. 세 사람의 복음서(福音書) 저자(著者)는 그들의 역사(歷史)를 낮고 평범(平凡)한 문체(文體)로 기술(記述)하였다. 따라서 거만한 많은 사람들은 그 문체(文體)를 경멸(輕蔑)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리(敎理)의 중심점(中心點)에 주의(注意)를 기울이면, 복음서(福音書) 저자(著者)들이 인간(人間)의 능력(能力)을 초월(超越)한 하나님의 신비(神秘)를 논(論)하고 있음을 금방 알 수 있는데, 진정 겸손(謙遜)한 마음을 가진다면 누가복음 제1장을 읽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성경(聖經)속에 내재(內在)하는 천적(天的)인 위엄(威嚴)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매료(魅了)하여 완전(完全)히 사로잡아 버린다. 그 속에 간단하게 요약(要約)된 그리스도의 강화(講話)는 어느 누구도 멸시(蔑視)하지 못하게 할 뿐 만 아니라, 요한은 위엄(威嚴) 있게 책망하면서 믿음으로 순종(順從)하지 않는 완고(頑固)한 자(者)들을 향하여 벼락 치듯 강(强)하게 꾸짖는다.

12. 성경(聖經)에 대한 교회(敎會)의 불변적(不變的)인 증거(證據)
사악(邪惡)한 자들의 온갖 방해(妨害)에도 불구하고, 장구(長久)한 시대(時代)를 거쳐 경건(敬虔)한 사람들은 성경(聖經)에 순종(順從)하며, 성경의 가르침을 전(全) 세계(世界)에 전파(傳播)하여 왔다. 만일 성경(聖經)이 인간들의 힘에만 의지(依支)해 왔다면, 세상의 성경을 파괴(破壞)시키려는 모든 악(惡)한 세력(勢力)으로부터 건실(健實)하게 지켜 오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생각이 다르고 언어(言語)가 다르며, 이해(理解)가 다른 세계(世界)의 많은 민족(民族)들이 성경(聖經) 앞에 완전(完全)히 일치(一致)를 보인다는 것은 진정 하나님의 섭리(攝理)인 것을 증명(證明)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지(意志)로 말미암지 않고는 그러한 일치(一致)가 성립(成立)될 수 없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렇게 일치한 사람들의 경건(敬虔)을 고려(考慮)할 때 적지 않은 중요성(重要性)이 더해지는 것이다.

13. 순교자(殉敎者)들은 성경(聖經)의 교리(敎理)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많은 성도(聖徒)들의 피로 확증(確證)된 성경(聖經)은, 일단 그 교리(敎理)를 받아들이면 용감하고 대담무쌍하게, 심지어는 큰 정렬을 가지고 죽음을 당하는 것까지 주저하지 않는다. 이렇게 많은 보증금(保證金)을 주었는데 우리는 어떻게 흔들리지 않는 확신(確信)을 가지지 않겠는가? 성경(聖經)의 위엄(威嚴)과 권위(權威)가 경건(敬虔)한 자(者)들에게 마음의 확증(確證)을 주고, 비방자(誹謗者)들에게 대항(對抗)하여 훌륭하게 변호(辯護)되었던 것은 성경(聖經)의 위엄(威嚴)과 존귀성(尊貴性)을 확증(確證)시켜 준다. 또한 성경(聖經)은 하나님의 구원(救援)하는 지식(知識)을 궁극적(窮極的)으로 일으킬 수 있게 된다. 실로 성경(聖經)을 확증(確證)하려는 인간적(人間的)인 증거(證據)는, 그 주요(主要)하고 우선적(優先的)인 증거(證據)에 대하여 제 2차적(二次的)인 보호자(保護者)의 역할(役割)만 한다면 결코 무익(無益)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불신자(不信者)에게 성경(聖經)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증거(證據) 하려는 자(者)들은 매우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이 아니고는 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이 경고(警告)한 바, 사람이 그렇게 큰 문제(問題)를 이해(理解)하기 위해서는 경건(敬虔)과 마음의 평안(平安)이 선행(先行)되어야 한다고 한 것은 올바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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